제 10회 SF어워드 2023 -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 및 심사평
대상 <모래도시 속 인형들> 이경희
작가 소개
죽음과 외로움, 서열과 권력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장편소설 《모두를 파괴할 힘》 《그날, 그곳에서》 소설집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논픽션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등을 썼다. 《테세우스의 배》로 2020 대한민국 SF 어워드를 수상하였다.
2019 황금가지 제4회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 2029 안전가옥 <대스타> 스토리 공모전 / 2020 SF어워드 장편부문 대상
작품 소개 (줄거리)
가까운 미래. 첨단 기술 도시 ‘샌드박스’에서 범죄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연작 소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χ Cred/t〉, 〈저 디지털 세계의 좀비들〉, 〈파멸로부터의 9호 계획〉, 〈슈퍼히어로 프로듀서〉, 〈트윈플렉스〉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간조사사 주혜리와 검사 진강우는 거대 기업들의 은밀한 범죄를 수사하며 그 이면에 감추어진 초월적 인공지능의 비밀에 점차 접근해 간다.
수상소감
사이버 펑크 세계에서 능청스러움을 무기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수사관. 황당하고 유머러스한 사건부터 처절하고 우울한 사건까지 어떤 에피소드에 가져다놓아도 어울리는 주인공을 그려낼 수 있다면 성공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이 시리즈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기 때문에요.
<모래도시 속 인형들>이 SF 어워드를 수상하게 된 것도 주인공 혜리와 강우를 사랑해주신 수많은 독자님들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도움주신 동료 작가님들, PD님들, 그린북 에이전시를 비롯한 소중한 분들께 영광을 바칩니다.
우수상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이산화
작가 소개
SF 작가. 저서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증명된 사실》, 《밀수: 리스트 컨선》,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잡지 및 앤솔러지에 단편소설을 싣거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제2기 운영이사를 역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증명된 사실〉로 2018년에,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로 2020년에 각각 한국 SF 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작품 소개 (줄거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온갖 초자연현상에 대처하기 위한 공조직인 문화체육관광부 기이현상청. 그 구성원들의 일상은 여느 공무원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특정한 파장의 노을빛과 얽힌 예산 집행 경위를 해명하거나, 동네 슈퍼 냉동고 밑바닥에서 발견된 아이스크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주말 외근을 나가거나, 업무상으로 만난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거나, 지방에서 일어난 사이비 종교 문제의 해결을 하도급업체에 위탁하거나, 경복궁을 뒤덮은 기이현상으로부터 시민들을 지켜내고자 용감히 현장으로 뛰어들거나……. 기이하다면 기이하고 낯익다면 낯익은 이들의 업무 기록을 다룬 연작소설.
수상소감
SF어워드 시상대에 서본 것도 이걸로 벌써 세 번째네요! 지난 두 번은 중단편 부문이었지만, 이번에는 장편 단행본으로 수상하게 되어서 더욱 각별한 기분입니다. 독자분들도 재밌게 읽어주셨고, 저도 구상하는 내내 즐거웠기 때문에 애착이 있는 작품이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시의성이 조금 떨어지나 싶다가도 갑자기 또 없던 시의성이 생기고 그러는 게 조금 복잡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제가 ‘세종대왕 머리 깨는 이야기’라는 기획을 들이밀었을 때부터 책이 실제로 나올 때까지 줄곧 침착하게 대처해 주신 상식적인 안전가옥 여러분께 많은 감사 드리고요, 기이현상청 관계자들의 다음 이야기도 열심히 구상하고 있으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우수상 <조선 사이보그전> 유진상
작가 소개
1993년에 태어났다.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연극을 소재로 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그 이름, 찬란>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떠올린 ‘한복을 입은 로봇’이라는 이미지를 소재로 한 소설인 <조선사이보그전>으로 제2회 문윤성 SF문학상 장편부분 우수상을 수상했다.
작품 소개 (줄거리)
언어 연구를 위해 아이돌 외모를 한 로봇이 조선 시대로 보내진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로봇은 어쩔 수 없이 의원 행세를 하게 되는데 너무도 성공적으로 정착한 로봇은 ‘명의’로 소문이 나고, 인간들과 가족의 관계까지 맺으며 정착한다. 그런데 때는 하필이면 임진왜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간 의붓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로봇은 먼 길을 떠나지만,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에게 붙잡혀 학질에 걸린 적장을 구해야 하는데….
수상소감
처음 SF소설을 써보자 결심하고 한국 SF소설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좋아하기 시작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저도 SF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고 그 작가분들과 동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가 동료 중에서 제가 유독 더 좋아하는 작가들은 한 번씩 이 SF어워드에서 상을 수상을 하셨더군요. 제가 같은 상을 받게 된 것이 얼떨떨하면서도 참 기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뜻깊은 상을 받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 사이보그전>은 여기저기에서 밝혀왔지만, 한복을 입은 로봇이라는 이미지에서 시작된 소설입니다. 그러한 이미지 속에서 ‘종부’라는 인물을 발굴하고 종부의 이야기를 문장으로 완성해나가는 과정은 제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제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완성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쓸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소설가로서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결과물인 이 소설에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장편소설 부문 심사평
·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장 심완선
수상작 심사는 확신과 회의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가는 일이다. 심사위원은 ‘내 판단이 맞을까? 무언가 놓치진 않았을까?’라는 불안을 품고서도 무엇을 수상작으로 선정할지 어떻게든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심사위원과 의견이 충돌하면 차라리 반갑다. 작품의 의의와 가능성을 깊이 이야기할 자리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심사위원 간에 다소 대립이 있었다. 덕분에 ‘무엇이 좋은 SF인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논할 자리가 만들어졌다.
좋은 SF를 판별하는 기준은 당연히 단일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SF 어워드에 청소년 부문을 신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 국내에선 청소년 소설에 속하는 SF가 상당히 많이 출간되고 있는데, 이들은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갖춘 만큼 아무래도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가 어렵다. 청소년 SF가 적절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들 작품을 따로 묶어 심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으로는 웹으로 발행된 장편 SF를 평가하는 부문도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SF 어워드 규정에 따르면 장편 부문은 종이책으로 출간된 소설을 기본으로 한다. 덕분에 전자적으로만 공개된 작품의 경우 웹소설 부문에 속하는지, 장편 부문에 속하는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지 일일이 검토를 거치게 된다. 분명히 SF인데 규정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현실적으로 심사대상이 되지 않는 작품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한국의 SF를 판별하고 좋은 작품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위해서는 차차 보완을 고민해야 할 영역이다.
이처럼 부문을 신설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는 물론, 한국에 그만큼 SF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SF에 관해 상대적으로 훨씬 다양하고 세세한 수상이 이루어지는 휴고상을 떠올리며, SF 어워드 역시 여러 부문으로 발을 뻗어나가기를 빌어본다.
장편 부문은 두 가지 경향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작품의 길이가 전반적으로 짧아졌다는 점이다. 특히 중편 길이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장편 부문의 심사 대상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한국 출판계의 전체적인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길이는 해당 작품의 구성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러한 변화가 한국 SF의 성향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될지 관심이 생기는 부분이었다. 한편 내용 측면에서는 포스트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작품이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포스트아포칼립스는 ‘대재앙 이후’를 뜻하는 말로, 보통 거대한 멸망을 다루는 작품이 이에 속한다. 예심 후보작이 된 40여 작품 중에서 약 열댓 권이 포스트아포칼립스에 속하거나, 적어도 기존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진 세상을 다룬 것으로 보인다. 간단하게 환산하면 삼분의 일이 넘는 비율이다. 그리고 멸망의 원인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였다. SF가 현재에 잠재된 가능성을 다루는 장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역시 흥미로운 경향이었다.
개별 작품을 평하자면, 이경희의 [모래도시 속 인형들]은 연작소설의 형식을 이용해 SF의 관습을 다채롭게 활용한 작품이었다. 매 편마다 스펙터클한 매력이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장르 독자가 기대할 법한 모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진부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장르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엿보였다. 덕분에 대상 수상작은 비교적 수월하게 결정되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모두를 파괴할 힘]도 비슷한 장점으로 예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이대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쌓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산화의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코스믹 호러를 한국의 공무원 사회와 연결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코스믹 호러 특유의 요소와 ‘기이함’을 적절히 배치하면서, 현대 한국의 일상을 섞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세련되게 느껴졌다. 한 편 한 편이 더해질수록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연작소설의 매력을 살려 이야기의 무게를 불리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여러모로 ‘한국 SF를 읽고 있다’는 재미가 있었다.
유진상의 [조선사이보그전]은 말끔한 구성으로 무난하게 좋은 평을 받았다. 주인공 안드로이드(제목과 달리 사이보그가 아닌)에 관한 설정을 조금씩 비워둔 부분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자세히 묘사해야 할 부분과 적당히 비워둘 부분을 잘 취사선택한 것이라 보였다. 조선시대와 전쟁을 배경으로 삼아서 휴머니즘을 고민하되, 고민의 주체를 비인간으로 삽입한 점도 적절한 결합이었다. 덕분에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최종 후보에 오르진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이 깊이 이야기한 작품은 천선란의 [랑과 나의 사막]과 전윤호의 [경계 너머로, 지맥]이었다. [랑과 나의 사막]은 독자를 다독이는 듯한 문장과 묘사가 큰 장점이었다. 다만 SF로서는 색채가 흐릿하여 SF 어워드의 수상작으로 선정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경계 너머로, 지맥]은 여러모로 하드 SF를 계승하고자 하는 작품이었다. 마인드 네트워크나 하이브 마인드 설정에 공을 쏟았다는 점도 느껴졌다. 그러나 이야기가 고전적인 플롯에 머무는 점, 인물이 평면적이라는 점 등에서 결국 미흡한 면이 있었다.
수상 여부에 관계없이, SF를 창작하는 작가 전부에게 응원의 말을 보낸다. 계속해서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주시길 바라며, 건필을 빈다.
·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노대원
2023년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 대상작은 이경희 작가의「모래도시 속 인형들」이다. 이 작품을 모든 심사위원이 추천한 까닭에 대상작이 바로 결정되었다. 이 소설은 SF로서의 장점들을 두루 갖춘 수작이며 독자 대중을 위한 훌륭한, 즉 ‘재미있는’ 읽을거리임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택 특별자치시 기술규제 면제특구“는 첨단 기술의 개발과 실험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지역이다. 이곳은 기술에 대한 규제가 면제 받는 일명 ’샌드박스‘ 지역인 만큼 온갖 사건과 사고가 벌어진다. 이러한 설정은 SF 스토리텔링을 위한 최상의 스토리세계(storyworld)이다. 작가의 재기발랄한 사고실험과 SF 유희를 위한 최적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옴니버스식 구성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 각 이야기들은 흥미로운 SF 아이디어(novum)들을 앞세워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활력을 과시한다. 이 장편소설 속 각 단편들은 그렇지 않아도 속도감 있는 이야기를 결코 늘어지지 않도록 강력하게 제어한다. 또한 이 짧은 이야기들은 동일한 시공간과 주요 인물을 공유하면서 전체의 구성 속에서 생명력을 이어 나간다. 많은 독자들이 이 시리즈의 후속작을 기대할 것이다. 아마도 작가와 프로듀서의 의도한 결과이겠으나, 대중적인 영상화에서도 장점이 확연하다.
이경희는 스토리텔러로서의 기술적 재능 이상으로 예리한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작가이다. 이 포스트휴먼 사이버펑크 SF에는 우리 사회의 그늘을 두루 담아내고 있다. 현대 미디어를 풍자하는가 하면 한국의 교육 문제를 건드린다. 샌드박스라 불리는 저 미래 도시는, 기술 친화적인 사회 혹은 기술 폭식 사회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한국을 비추는 비판적 거울이다. 성찰과 브레이크가 없다면, 우리에게 도래할 디지털 폴리스는, 미래학자 게르트 레온하르트가 말한 ’헬븐‘(HellVen), 또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어쩌면 ’유스토피아‘(ustopia)가 될 터이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용어 해설이 필요할 정도로 SF 설정을 폭발적으로 쏟아내는 이경희 작가의 작법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한 명의 프로불편러-독자로서 나 역시 그 점이 걸리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SF 작법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수상에는 유진상의 「조선사이보그전」이 선정됐다. 중세 한국어 연구를 위해 타임머신으로 조선에 가게 된 휴머노이드 로봇 G9의 이야기이다. G9는 조선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의원이 된다. 그는 '종부'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4명의 아이들을 자녀로 삼는다. 종부가 도착한 조선은 임진왜란 시기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전란 속에 목숨을 잃던 시절이다. 종부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점점 인간이 되어 간다. 지금까지 요약한 줄거리에서처럼, 이 소설은, 로봇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사뭇 익숙한 포스트휴머니즘의 질문을 반복한다. 또한 의원이 된 로봇이란 설정으로, 그보다 더 낡고 낡은 휴머니즘 윤리를 반복한다. G9와 타임머신에 관한 것 역시 그다지 치밀한 SF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독자를 기어이 매혹시킨다. G9와 종부의 시간을 교대로 서술하는 플롯 구성은, 단순하면서도 읽는 재미를 주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종부가 되어가며 슬픔을, 그리하여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G9의 ’인간-되기‘ 서사는 그 익숙함에도 끝끝내 독자를 감동시키고 만다. 조선을 배경으로 삼은 하나의 SF로서, 역사적 상상력과 접속하여, 한국 SF의 시공간과 상상력을 넓히는 일에도 기여했다.
이산화의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도 우수작에 꼽혔다. 과학소설로서 SF보다는 오컬트를 중심 소재로 하는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으로서 SF에 가깝다. SF어워드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주관하는 상이라는 점에서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이 소설이 한국 SF의 외연을 확장시킬 것이라는 데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과학소설이란 용어에서 과학은 주로 서구적 근대 과학기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편향과 제약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글로벌 SF는 비서구적, 비근대적 과학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데까지 이른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과학이 아니라 앎과 지혜, 혹은 이러한 단어로도 품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다시 말해 지금의 과학소설은 과학소설을 넘어선다. 이산화의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생성적 적대 신경망 원리가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 항아리에 깃든 요상한 정령과 이어지고, 과학 발명의 시대를 연 세종의 혼령이 등장하는 기이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대중적 재미는 이경희 작가의 모래도시 속 인형들처럼 속도감 있는 옴니버스식 스토리텔링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오컬트적 서사 탐구가 SF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더 부딪쳐, 새로운 미적 행로를 열어나가며 깊이 있는 후속작을 빚어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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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 수상작에 들지 못했으나, 기억해 두고 싶은 소설들이 많다. 전윤호의 경계 너머로, 지맥은 과학소설의 이름에 값하는 하드 SF이다. 증강동물과 BCI(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소재로 하여 과학소설의 재미를 일깨운다. 다만, 증강동물에 대한 생명윤리와 기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더욱 깊게 탐구하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쉽다. 김준녕의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은 파리대왕과 <설국열차>의 디스토피아 세대 우주선 버전의 SF다. 프롤로그의 재치 넘치는 문체에 비해 어둡고 진지한 본 이야기 간의 간극이 아쉬웠는데, 프롤로그 스타일의 SF도 기대해 본다. 천선란의 랑과 나의 사막는 이즈음 생태적 포스트휴머니즘 윤리라는 한국 SF의 지향과 감수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거론할 만하다. 이 아름다운 문학적 우화는 인류세와 대멸종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애도이자 비가로 보인다.
모든 작가들에게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향한 ’우리‘의 길을 만들어 보여준다. 어느 길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지, 그들은 우리 대신 미리 미래의 길을 걸어가며, 쓰고 있다.
·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최지혜
모든 문학과 예술 분야가 시대의 영향을 받으며 당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마련이며, SF는 인간에 대한 다른 접근, 미래 예측을 통한 현재의 투영에 강점을 지닌 장르로서 시대의 영향을 고유한 문법으로 소화한다. 이번 SF 어워드 장편소설 부문은 SF의 고유한 장르적 특성과 함께 국내 SF 장르의 다양성이 확대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미래에 도래할 사회와 기술을 탐구하듯 상상하는 작품과 형이상학적 관념을 형상화하는 작품은 물론이고, 환경 오염과 이상 기후, 동물권과 채식, 우울증과 자살 등 사회적 현안과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까지 소재와 주제에서 풍성한 해였다. 다양한 작품이 다양한 강점을 자랑하는 점이 즐거움이자 심사의 어려움이었으나,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장르문학 고유의 특징과 대중적 재미를 함께 잡은 작품을 이상으로 잡고 의견을 모았다.
이경희의 [모래도시 속 인형들]은 근미래 SF 스릴러이자 버디물이다. 근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되 흔한 서울이 아니라 평택 미군부대가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특구도시 샌드박스를 설정하며 현실적 지역성을 살리면서도 신선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특구의 검사와 조사원이 함께 범죄를 해결하는 연작인데, 대상이 되는 사건과 배경이 과학 기술로 인한 사회상 변화가 촉발하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는 면에서 더없이 SF에 충실하다. 또한 개성이 강한 인물과 ‘막장’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자극적인 사건으로 스릴러적 재미, 버디 탐정물의 재미를 함께 잡았다. 어느 한쪽이라도 모자라다면 극단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는데 균형을 유지한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산화의 [기이현상청 사건 일지]는 오컬트 호러와 대체 우주 SF, 공무원이 주인공인 미스터리가 다 합쳐진 작품이다. 서울의 봉헌, 사이비종교, 외계인, 렙틸리안, 무덤의 저주 등 SCP 재단을 방불케하는 괴이가 살아 숨쉬는 세상에서 공무원으로서 기이한 현상들을 처리하러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가 가장 잘하는 영역의 가장 잘하는 이야기라서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실재하는 듯한 몰입도를 선사한다. 순간순간 현실의 무엇을 풍자했는지 연상시키는 유머도 매력적이다. 너무나 작가 자신에게 충실한 나머지, 독자에게는 조금 거리가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 아쉽다.
유진상의 [조선 사이보그전]은 조선으로 언어학 연구를 위해 파견된 안드로이드 G9가 인간 종부로서 살아가며 스스로의 운명을 만드는 이야기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 로봇이나 안드로이드가 인간성을 갖게 되는 이야기, 미래에서 과거로 와서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그 두 가지가 합쳐진 [조선 사이보그전]은 흔하지 않은 흡입력을 갖춘 작품이다. 안드로이드 G9가 가진 한계, 왜란 중의 조선이 품은 혼란을 전혀 혼란스럽지 않게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가운데 주인공의 인간적 매력이 빛을 발한다.
위의 세 작품 외에 주목했던 작품에는 한수영의 [오로라 2-241]이 있었는데, 시간을 넘어 과거에 떨어진 미래 소녀와 소녀가 떨어진 사과 과수원을 통해 이상기후에 관한 경고를 보내는 작품이다. 현재에서 이야기 대부분이 진행되지만 미래를 담아냈다는 점, 사과로 현재와 미래를 이으며 이상기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교훈을 주지만 교훈적이지 않은 청소년 문학, 청소년 SF로 탁월했다. 문학에서 저변이 넓어지면서 아동 청소년 부문이 SF 어워드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웠다.
유진상의 [조선 사이보그전] 외에도 민이안의 [눈을 뜬 곳은 무덤이었다], 김준녕의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김원우의 [크리스마스 인터내셔널]은 각각 공모전을 통해 수상하고 출간된 작품들인데, 공모전의 수나 수준, 다양성이 대단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이전 어워드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천선란의 [랑과 나의 사막], 박문영의 [세 개의 밤]은 깊이 있는 주제의식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격조를 보여주었다. 전윤호의 [경계 너머로, 지맥]은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동물권, 인권이라는 주제에 기업 스릴러를 결합해 흥미로운 작품으로 저력을 보여주었다.
장르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고민을 담아 성심껏 쓰고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다듬었을 작가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