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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SF어워드 2023 - 중·단편소설 부문 수상작 및 심사평

 


 

대상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백사혜

작가 소개

‘궤적잇기’ 로 제 2회 문윤성 SF 단편 부문 우수상 수상.
개인저서로 ‘이방인의 심장이 묻힐 곳은’이 있다.


작품 소개 (줄거리)

우주 전쟁이 끝난 후, ‘나’는 히엠스라는 행성이 세워진 탑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게 된다. 배양관의 아기를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완벽하게 키우는 것이 죄수인 ‘나’의 임무였고, 매뉴얼에서 어긋날 때마다 아이는 폐기된다. 그러던 어느 날 무덤지기의 뜻 모를 호의로 아이가 묻히는 곳으로 가게 된 ‘나’는 거기서 용을 만난다. 유전자 배열로, 단순한 오락거리로 만들어진 용을 본 ‘나’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나’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기 시작하고, ‘인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이가 만들어진 목적을 알게 된 ‘나’는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 아이를 죽이게 되고, ‘나’의 마음과 무관하게 또다시 배양관에서 아이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절망한다. 그러던 중 무덤지기가 찾아와 더 이상 아이를 키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충격적인 진실을 밝힌다. 유일하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이야기’를 갖기 위해서 수많은 복제아를 죽여 왔던 그는 ‘나’가 그의 이야기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나’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무덤지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그를 죽이고, 행성의 영주에게 붙잡히기 전 용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부탁한다. 수많은 복제본일 뿐인, 그러나 ‘인사’이기도 한 마지막 아이를 살려달라고. 죽은듯 사는 게 아니라 살듯이 죽겠다고 다짐하면서.


수상소감

그림에서 ‘빛’은 반드시 표현되는 요소 중 하나지만, 화가마다 빛을 쓰는 목적과 기법은 다 다릅니다.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SF라는 장르의 글들도 작가분들의 관심사와 문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의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개성적인 작품들 중, 제 글을 관심 있게 봐주셨다는 점에서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사회적 압력에 의해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상실한 주인공이, 다시금 사랑하는 법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동화의 형식을 살짝 빌려 풀어낸 SF 단편입니다. 사랑의 가장 작은 단위인 관심조차 주변의 환경에, 상황에 짓눌리는 경우를 자주 봐왔습니다. 그런 이웃간의 사랑이 상실된 시대에서, 완벽한 사랑의 이야기를 갈망하는 모순적인 현상이 얼마나 큰 간극과 비극을 자아낼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음 출판사의 멋진 과학잡지에 단편을 싣는 것을 제의해주신 김초엽 작가님과 제가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도와준 송아 언니, 그리고 친구 세영이에게 특히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수상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우수상 <긴 예지> 우다영

작가 소개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중편소설 북해에서가 있다.


작품 소개 (줄거리)

어느 날 모든 일에 무기력해진 효주는 홀로 고립된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한 쌍둥이 자매의 베이비시터로 일하게 된다. 쌍둥이 중 동생은 <볼볼볼>이라는 증강현실게임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데, 최연소 랭커였던 그 아이를 정부기관에서 데려간다. 그 후 효주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아이가 좋아하던 <볼볼볼>을 내려받아 무작정 플레이하기 시작한다.


수상소감

어린 시절 품고 있었던 한 가지 절망은 생각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이면 아무렇지 않게 어린이의 일상을 시작하고 근심 없는 하루를 보낸 뒤 어두운 밤 침대에 누우면 다시 생각을 붙잡는 이상하고 고독한 도전에 빠져들었습니다. 생각은 멈추지 않고 고이지 않고 여러 줄기이며 여러 장면이었는데, 저는 그 모든 걸 한 프레임에 넣거나 한 손에 그러모으거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듯 멈추고 싶었습니다. 이해하고 통제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지요. 생각을 하나의 이야기로 붙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생각은 반대로 한 없이 확장되고 휘어지고 연결되는 초공간의 우주였습니다. 저는 그 재밌는 놀이터에서 세계를 실감과 달리 바라보는 방법, 오직 혼자만의 논리를 아름답게 쌓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이 폐쇄적이며 개방적인 사고의 결과물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뻤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SF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잔치가 먼저 떠오릅니다. 즐거운 잔치에 손 내밀어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수상 <D-1> 오누이

작가 소개

신인작가. <D-1>으로 처음 독자들과 만난다.


작품 소개 (줄거리)

친구도 애인도 없이, 심지어 가족까지도 멀리한 채 돈만 모으는 파이어족 수미. 목표 금액 달성을 목전에 둔 어느 날, 지구의 시간이 멈추고 내일이 오지 않는 ‘프리즈’ 현상이 시작된다. 고층 아파트 창문 사이에 갇혀버린 가훈이를 만나면서 내일을 위한 삶이 아닌, 오늘을 위한 삶의 태도를 배워나갈 즈음, 세계 전쟁이 벌어진다. 오늘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과, 내일을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정답 없는 싸움,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수상소감

부족한 작품, 미숙한 작가에게 큰 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여기겠습니다.

먼저 언제나 저를 응원해주는 가족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설의 한 줄 짜리 아이디어 단계부터 지지하고 함께 해주고 있는 제 친구, 21스튜디오,

그리고 국내외에서 <D-1> 영상화를 위해 힘써주고 있는 앤쏠로지 스튜디오와

이 기쁨과 에너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 SF도 <D-1>도 모두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중·단편소설 부문 심사평

· 중·단편소설 부문 심사위원장 임태운

올해 중단편 부문은 무려 350편이 넘는 작품들 중에서 수상작을 가려내는 힘겨운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것은 현 시대 SF소설을 탐구하면서 단편이라는 한정된 분량 안에서 그것을 풀어내는 여러 작가들의 내공과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만찬의 자리이기도 했거든요. 심사위원단은 SF의 본령을 탐구하는 것과 동시에 소재에서 주제를 끌어내는 능숙함, 그리고 상상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패기, 마지막으로 읽는 이의 영혼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직조의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대상으로 선정된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최종심에서 가장 빨리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치열한 대결을 예상했으나 심사위원 전원이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신화적인 힘과 플롯의 세련미, 그리고 문장의 서정성에 깊이 감화되었습니다.

[D-1]은 평이한 제목이 유일한 아쉬움일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타임루프 액션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쾌하고 발랄하며 속도감이 대단합니다. 대상을 두고 다퉜던 다른 작품에 비하면 탄산음료 같은 청량함이 심사위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긴 예지]는 활자로 떠나는 먼 여정을 고독하고 힘차게 걸어가는 작품입니다. 플롯 뒤틀기를 거치면서 이야기가 계속 확장해 나가는데 이렇게 장쾌한 서사를 가진 작품들 중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섬세한 문장 연출입니다. 그런 면에서 [긴 예지]는 작가의 내공을 짐작하게 할 수 있을만큼 탄탄한 문장과 날실과 씨실 같은 표현들이 귀중했습니다.

[신의 소스코드] 역시 [긴 예지]처럼 상상력을 최대한 멀리 펼쳐보는 사고실험류 작품입니다. 게다가 형식 마저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방식을 취하면서 지루함을 덜어낼 수 있었지요. 꽤 긴 분량을 가졌음에도 그것 자체를 눈치채지 못한 심사위원이 많았을 정도로 가독성도 좋았습니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는 비슷한 소재로 풀어내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이 작품 안에서 구축한 세계관에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격의 디지털화라는 소재에서 그치지 않고 SF적 도약의 재미를 충실하게 담아낸 수작입니다.


· 중·단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금숲

벌써 세 번째 참가하지만 올해 심사는 예기치 않게 힘들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시간 배분이 잘못되어 가장 긴 시간이 드는 예심에 너무 짧은 시간이 주어졌고, 수상을 결정짓는 본심 회의는 작년에 온라인으로 합의가 될 때까지 여러 번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오프라인에서 단 한번, 한두 시간 안에 결정지어야했던 것이 아쉽다. 이 때문에 심사위원간에 깊은 논의는 어려웠고, 수상을 결정하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디테일에서 모든 위원의 충분한 납득은 끌어내지 못했다고 느낀다.

중단편 부문은 3백 편 이상의 작품이 각자의 색과 성격을 내보이며 자랑하는 찬란한 격투장이다. 그러다 보니 본심에 오를 정도면 보통 이미 수상 범위이며, 나머지는 미세한 차이나 기준의 선정, 때로는 취향에 의해 갈린다. 따라서 회의가 짧으면 이런 아쉬움을 더 많이 남기기 쉬운 분야다. 차후에 참고를 부탁드린다.

 

SF는 미래를 쓰는 것이라고 흔히 여겨지지만 올해는 과거(또는 전체 역사)를 대상으로 범위를 잡은 작품이 여럿 눈에 띄었다. 좋은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적인 배경을 사용하거나 변주하는 경우도 꽤 눈에 띄었다. 성서를 변주한 <오래된 미래(이중세)>나 그리스 신화를 변주한 <안드로메다 구하기(김설아)>는 어떤 이는 SF가 아니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SF의 작법을 충실히 사용한 좋은 작품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발견'에 김설아 작가를 놓고 싶다. 무엇이건 치열하게 마주하는 태도가 매력적이다. 작품집을 보면 그가 쓰는 것이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판타지가 아니라 SF라는 것이 더욱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신'을 주제로 잡은 작품은 숫자는 적지만 나타나면 꽤나 눈에 띄는 법인데, <원시인의 노래(묵독)>, <오래된 미래>, 수상작인 <긴 예지>도 이에 속했다. 잘못 다루면 너무나 재미가 없어지지만 이 작품들은 흥미로웠으니 궁금한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겠다.

 

여전히 '종말' 또는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재가 대다수라 할 정도로 많았는데, 코로나 시대에는 역병이나 격리의 환경이 주로 쓰여진 반면, 올해는 그에 한정되지 않은 종말 이야기가 많아 작품군이 풍부해졌다. 최근 사는 것이 다들 힘들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희망을 갖거나, 또는 희망이 없더라도 남은 삶 동안 의지를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이 작품들에서 느껴졌다.

 

또 늘어난 소재는 '메타버스'인데, 아직은 새로운 영역이라 종말보다는 덜 개척된 것 같다. 설정이 좋으면 이야기가 그에 미치지 않았고, 이야기가 좋으면 설정에 구멍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블루오션이라는 뜻일 수 있으니 많은 도전이 있었으면 한다. 그런데 자료 조사는 꼭 많이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지만 단연 '마인드업로딩'이 가장 많이 늘어난 영역이라 볼 수 있다. 메타버스와 섞여 있거나 또는 독립되어 사용된 소재인데, 작품 두 개를 주우면 하나는 종말 하나는 마인드업로딩일 정도로 많았다. 마인드업로드가 된 사람의 관점보다는 이를 바라보는 밖의 관점이 주요 소재였다.

 

본심작 중 <책이 된 남자(김필산)>는 고전적인 배경을 가지면서도 마인드업로딩을 잘 그려낸 천재적인 작품이다. 여러 시대를 걸쳐 절묘하게 짠 플롯, 흥미로운 캐릭터, 호러 요소를 얹어 오싹한 재미. 장미의 이름이 생각나는 철저한 배경 설정. 수학의 활용. '이 작품이 대상이 아니라니!' 하지만 이것은 올해만의 일도 아니고 나만의 일도 아니다. 심사위원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심사란 것이 원래 그렇다. 한 사람의 기준만 충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인드업로딩 작품으로 본심작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윤이안)>은 심사위원들이 같이 아쉬워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마인드업로딩 아이디어 자체는 AI 스피커라는 가벼운 설정이 사용되었지만, 이를 소재로 벌어지는 한국적인 상황이 카타르시스적인 재미를 준다.

 

한편, 미스터리와 SF의 결합은 상성이 아주 좋지만 이를 시도하는 작품이 극히 적어 늘 아쉽다. <별들은 강을 이루고(김주영)>은 완성도 면에서는 최고라고 느낀다. 엽편이면서도 미스터리 하드보일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고전적인 SF의 매력을 잘 가지고 있다. 차별 사회에 대한 경고이면서, 위트가 엿보이는 좋은 작품이다. 허나 아무래도 엽편이라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마지막에 경합에서 떨어진 <신의 소스코드(존 프럼)>은 멀티버스, 또는 "세상이 만약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이라는 지극히 오래된 아이디어를 끝의 끝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Fake Documentary형식을 결합해 지루할 만한 이야기를 잘 풀어낸 것이 눈에 띄었다. 다만 뒷부분이 다소 반복되며 지루해지는 것이 약간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대담하고 멋진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거북과 용과 새(듀나)>는 대체역사물, 그것도 단편 레벨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다만..서간문 형식에 기댔어도 사건 나열에 가까운 작품이라서인지 표를 얻지는 못했다. 가상 역사물 덕후 입장에서는 한 줄 한 줄이 모두 놀라움이었다고 전하고 싶다. 다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혼자 책상 앞에서 기립박수까지 쳤고, 재검토 때 다시 읽고 역시 좋아~! 를 외쳤으니... 호불호가 이렇게 많이 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쓰기가 참 어려운 장르인 렙틸리언(파충류-공룡 인간)작품 계보에 올릴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실제 역사에서 약간만 건드리며 줄타기를 하는 대체역사물이 아니라, 더 뒤로 돌아가 대부분을 수정하는 일은, 시도로 그치고 성취는 적은 분야라 감동이 더 컸던 듯 하다. 다만 작품 내에서는 굳이 제공하지 않는 약간의 배경 지식을 모르면 읽기가 고역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다. 어쨌거나 아이디어만으로 본다면 놓치기 아까웠다. SF가 이런 형식은 왜 안 되냐며 외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고대를 좋아하고, 가상 역사를 좋아하고, 연표를 좋아한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또 누군가 과몰입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면 좋겠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심사위원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는다는 건 그만큼 촘촘한 그물을 잘 빠져나갔다는 의미가 된다.

수상작 <D-1(오누이)>은 읽는 재미로는 후보작 중에 가장 좋았다. 타임루프라는 닳고 닳은 소재를 또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독창적인 작품이다. 사랑과 전쟁은 이야기를 박진감있게 구성할 수 있는 좋은 재료다. 이를 이용해 플롯을 몇 단계로 나누어 지루하지 않고 풍부하다. 어찌 보면 '종말'카테고리에 넣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종말 직전'의 아슬아슬함이 더 맞을 것이다. 몇몇 장면이나 대사는 계속 기억에 남는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되 수상에 충분하였다.

 

<긴 예지(우다영)>는 장편 느낌을 주는 구성이 좋다. 특별히 놀라운 아이디어는 없어도 여러 가지를 가져와 조합한 방식이 독특하다. AR게임, 시뮬레이션 월드, 종말의 예언 등을 한데 조립해 담아낸 솜씨가 좋았다. 캐릭터가 강하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작품만의 분위기를 지속해서 잘 살렸다. 몹시 강렬한 시작에 비해 진행상 다소 루즈해진 뒷 부분이 아쉬웠을 뿐 그 외 딱히 감점될 곳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아이디어가 좋았다.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백사혜)>는 판타지의 그림자를 뒤에 걸친 SF다. 인어와 탑에 갇힌 공주, 기사, 용이 등장하는. 그런 점이 어슐러 르 귄을 생각나게 한다. 분류적으로는 유전자 디자인, 인간 복제 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자본주의 노예 시스템에 맞서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의 육아 투쟁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육지에서는 지체 장애인이기도 한 화자가 물 속에서는 강하고 자유로운 것도 눈에 띈다. 그만큼 다층적인 작품이고, 한 번 이상 읽어 보아도 괜찮겠다. 화자가 처한 상황에 감각적으로 몰입시키는 솜씨가 좋다. 읽으면서 강렬한 추위, 이불의 따뜻함, 물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점도 르 귄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흔치 않은 일이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작품을 읽어야 하는 중단편 심사는 고된 일이지만 그만큼 많은 작품에서 얻어가는 것이 많은 일이기도 하다. SF를 사랑하는 더 많은, 능력자 분들이 심사를 경험해보셨으면 하고 바란다.


· 중·단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은림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백사혜

동화의 원형과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를 전부 활용해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SF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로맨스의 완성이자 천형인 사랑의 족쇄를 끊어냄으로 진정한 자유를, 자신을, 삶과 죽음을 획득해 낸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완벽한 그리고 단 하나일 존재가 그저 매뉴얼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폐기 되고 재생산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신의 형벌이 끝나는 날-영주의 진정한 관심(?)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아닌 개구리처럼 추한 모습의 자신에게로 향한 날, 그를 살해하고 ‘인사’라는 이름을 붙여준 아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인사’는 주인공이 기른 아기들 중 서른 한 번째 아기에게 처음으로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때 주인공은 아기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새로운 자신<-삶의 목표, 방향성>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금처럼 흘러가는 대로 무력하게 살지 않고 적극적인 선택과 저항을 하는 진정한 삶을 살겠다고 결정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D-1 오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타임루프라는 SF 장르를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앞에 그대로 가져온 디테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수미’는 입사 후 10년 안에 20억을 모아 은퇴할 계획을 가진 파이어족으로 부업과 저축과 재테크에 온 힘을 쏟으며 수도승에 가까울 정도로 검소하고 금욕적인 삶을 삽니다. 하지만 프리즈(작중 ‘하루 반복’을 가리키는 용어)가 전 세계를 덮치자 기다리는 행복한 은퇴의 미래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에 새로운 변화와 가치를 찾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정반대의 인간이었던 가훈의 하루를 구하면서, 수미의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세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프리즈-기억을 유지한 채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작품 밖으로 꺼내오면 현실의 오늘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어제와 비슷하게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잠듭니다. 세월은 미세하게 우리를 스쳐 깨닫기도 전에 생장시키거나 마모 시킵니다. 거대한 세계의 변화는 디프로스터 백서처럼 멀고 먼 매체 안의 이야기이며, 어떤 날은 며칠이나 어제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히려 완전히 닫혀있는 단 하루로 무수히 많은 변화한 내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대담하게 확장해버립니다. 실린 책의 제목이 <인류애가 사라졌다>였는데, 저는 이 작품을 읽고 인류애가 조금, 살아났습니다.

 

긴 예지 우다영

로또와 게임을 증강현실로 절묘하게 접합시켜 예지자들을 선별해낸다는 소재가 SF 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이고, 이야기의 전달은 현실처럼 생생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틀린 선택 또한 예지의 한 종류라는 긍정적 반전도 신선했습니다.

예지자나 미래예측기계가 나타나고, 그들의 예지, 혹은 인지로 불확실했던 미래가 확정되어 버리고, 재앙을 자초하게 되는 패턴은 여러 매체로 변주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예지자들 끼리의 예지력 싸움으로 중첩된 미래들이 결국 현실화는 되지 않고 무한히 반복되며 결국 세상은 무사히 유지되는 것이 마치 끝나지 않는 체스 판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 한 줄 한 줄에 수천만가지로 갈라지는 미래의 시간과 스쳐가는 세계를 함께 주인공과 함께 경험하면서 저는 깊은 삶의 피로와 신에게까지 닿는 결말의 장대함에 숙연해졌습니다.

 

신의 소스코드 존 프럼

이 세상이 하나의, 아니 중첩된 거대한 게임들 속이라면. 세상을 만드는 신의 소스코드가 공개되면서 많은 엔지니어들이 수 천 만가지 게임 세상을 만들며, 또 그 안에서 하위 게임 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마치 다중 우주가 빅뱅처럼 폭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혼란스럽기까지 한 복잡한 이야기를 페이크 다뉴멘터리처럼 만들어서 독자를 매혹적으로 빨아들이는 구성이 아주 세련되었습니다.

한번 존재한 것은 존재하기 이전으로는 되돌릴 수 없으며, 상위층으로 올라갈 수는 있지만 내려올 수는 없으므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진정 신일 거라는, 신에 대한 지독한 갈망이 결국 산뜻하지만 뼈아픈 첫사랑으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애잔했습니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김혜윤

인간의 기계전이로 영생을 얻는 것이 일상화된 미래에, 그 전이마저도 여전히 빈부와 소수자 차별이 여전하다는 것에 슬픔과 분노가 일지만, 이 또한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배경장치라는 것을 견디면서 읽었습니다. 지워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일. 미래를 향한 SF 소설 속에서조차 여전히 힘겹기만 하고 도외시 되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고되고 존엄한 여정을 묵묵히 써나간 용기와 힘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들이 변하고 낯설어지고 결국 꺼져버리는 먹먹한 순간들을, 혼자라도 살아남으려 달아나는 생존 본능과 죄책감을 저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무수한 침해와 절망과 배신에도 서로를 돕고 구하고 이어지려는 다정함을 잃지 않는 정도경 작가의 <외딴 섬 뉴런>, 이모의 장례식에 유언장인 인공지능 스피커를 참석시켜 벌어지는 한바탕 가족희극을 연출한 윤이안 작가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우주에는 존재할리 없는 거대한 사과 창고에서 푸른 사과를 매일 아삭아삭 꺼내 먹으며 몇 번이고 실패를 번복하면서도 아무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존엄함 여정을 그린 진청 작가의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는 사과>,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사랑이고,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것은 불편함이라는 통찰을 전해준 박애진 작가의 <나 홀로 지구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빨리 소모되는 가진 것 없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정보라 작가의 <작은 종말>등 더 많이 전하고 싶은 좋은 이야기들을 묵묵히 스스로를 헌신하며 써내주신 모든 작가님들께 존경과 애정을 바칩니다.


· 중·단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이서영

예상한 바였지만, 훌륭한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예심부터 애를 먹었습니다. 표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작품을 여러 번 다시 읽어보기도 했지만 좋은 작품들 사이에서 몇 개의 작품을 선정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선정되지 못한 작품들 중에서도 굉장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씬 전체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심사경험이었습니다.

특기할만한 점은 여러 작품들 내에 비슷한 경향성이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소재와 주제 부분에 있어서는 아예 ‘이런 작품군’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경향성이 있었습니다. 마인드 업로딩이나 사이보그를 다루는 방식들 같은 경우가 특히 그랬습니다. 물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동시대가 보여주는 과학기술의 수준과 주제의식이 결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지점일 것입니다. 다만, 이게 일종의 전형성이 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염려도 좀 되더군요.

그럼에도 이 일련의 ‘작품군’ 안에는 다양한 실험이 있었던 만큼 작품으로서의 성취도가 높은 작품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도 했습니다. 한국SF문학이라는 ‘계’가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계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그 영향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지요. 일련의 작품군들을 바라보며, 전형성에 대한 염려와 함께 이 계가 어떻게 움직일까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SF이면서도, 과학기술적 장치들을 매끄럽게 활용해서 아주 고전적인 서사에 연결했습니다. 전형적인 SF는 아니지만, 전형적인(동시에 원형적인) 로맨스 판타지기도 합니다. 근대성(혹은 미래성)을 고전적 서사에 가져다 붙이는 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법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오랜 트릭이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인간이란 기술이 끝내 원형적 서사에 맞붙어 버리면 전율하고 마는 법이지요. 아서 클라크의 3법칙을 SF라는 차원 안에서 새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SF가 만들어낸 필멸자와 불멸자의 사랑 이야기, 비극적 결말을 비극적이지 않게 만드는 솜씨까지 매우 노련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D-1」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흔히 타임루프물이라고 하면 루프의 영향을 한 명만 받는 데에서 오는 고독감, 세계를 한 명의 의지로 바꿔보고자 하는 막막함을 다루게 마련인데 온 세상이 같은 기억을 가지고 함께 돌아간다는 설정을 패기롭게 적용한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기대가는 과정과 그 갈등 속에서 기묘한 세상이 계속해서 굴러가는 형태를 상상해내는 지점도 놀라웠습니다. 열린 결말로 끝났지만, 독자를 끝까지 책임지는 형태의 꽉 짜여진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수없이 활용된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긴 예지」는 시대정신에 완전히 부합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활용해서 미래를 예측하거나 바꿔보고자 하는 시도를 다룬 이야기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만, 이 소설에서는 사람들의 예측을 빅데이터를 통해 하나로 모아내는 시스템을 구획하고, 그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연결되는, 연결감, 다른 말로는 연대를 구축해냅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연결감을 만들어내는 방식 그 자체에서 SF적 요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멸망하는 세계(이미, 멸망해가고 있지요)를 뒤바꿀 힘은, 파편화된 기술(혹은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도 그걸 이어낼 수 있는 시선을 찾아내는 데에 있으리라는 다정한 확신이 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쉽게 수상권에 들어가지 못한 작품 중에서 존 프럼의 「신의 소스코드」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실험적인 형식을 차용해서 엉뚱하고 괴상한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한 작품입니다. 차원을 뛰어넘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는 언제나 SF의 가장 경이로운 주제 중 하나지요. 이 소설의 경우 메타버스를 메타시선으로 구현해서 서사에 힘을 만드는 방식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또한 김혜윤의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는 SF가 SF이게 하는 중요한 미덕을 지닌 소설이었습니다. 사이보그를 사이보그답게 다뤄서, 사이보그의 한계와 초월을 동시에 그려냈습니다. 기술이 적용되고 변화하는 지점을 날카롭게 짚어냈다는 점에서 깊이 감탄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계’는 복작복작하게 발전하겠지요. 인간의 사회가 그렇고, 과학기술이 그렇듯,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면서요. 발전할 이 유기체가 앞으로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