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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어워드 2018

SF어워드 2018 -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 및 심사평

SF어워드 2018

장편소설 부문 대상 - 김백상 《에셔의 손》

어느 날 문득 별을 하나 보았습니다. 아득하지만, 오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요. 별빛은 순식간에 제 눈을 타고 가슴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죠?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유난히 가슴이 울렸던 이유는요. 그날부터 저는 그 별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온 빛의 스펙트럼 속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스며 있었습니다. 별빛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저는 그 별에 <에셔의 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발견’하는 자일지도 모릅니다. <에셔의 손>을 쓰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별처럼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고 작가는 별을 발견하듯 이야기를 발견해 쓰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어쩌면 제가 <에셔의 손>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에셔의 손>이 저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에셔의 손>은 제게 이야기가 구축되는 방식을 알려주었고, 문장 쓰는 법을 지도해 주었습니다. 삶의 방향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꾸어놓았지요. 글을 쓰는 동안 글이 저를 가르친 셈입니다.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그 별에 이름을 붙이던 사람들의 기분을 알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름 지은 별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을 때의 마음을요. 책이 나오기까지 함께 고생하신 분들께, 책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SF어워드라는 장을 마련해주신 관계자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저는 날마다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어떤 별을 찾을지, 혹은 어떤 별에게 선택받을지 설레는 마음으로요. 밤하늘이 아름다운 건 밝게 빛나는 별 한두 개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수히 많은 별이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로 다채롭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빛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별을 찾고, 별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분들께 이 한 마디를 건네고 싶습니다.

밤하늘이 참 맑네요.


《에셔의 손》 심사평 중에서

전뇌와 가상현실, 네트워크라는 소재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가 어떻게 도구에 그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사용자를 바꾸어내는, 손을 그리는 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 송경아


완성도와 주제의식의 표현, SF적인 설정과 디테일 모두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사이에 큰 이견 없이 대상작으로 꼽혔다.

- 고호관


적어도 이 정도가 한국 SF가 성취할 만한 높은 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지평선에서 출발해 하나의 희미한 점이었다가 점점 균형 잡힌 크기와 매력적인 생김새를 갖추고 다가온 보기 드문 작품.

- 복도훈


장편소설 부문 우수상 - 김희선 《무한의 책》

살아있는 이야기(들)

우주엔 이야기가 떠돕니다.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전설인지 신화인지 사실인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 아주 오래 전 지구엔 신과 괴물이 살았고, 어딘가엔 영원히 죽지 않는 드라큘라가 관 속에 누워 있으며, 어떤 영국인 남자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갖 사건 사고의 범인을 찾아냅니다. 리틀록이란 이름을 가진 가상의 도시에선-그런데 그 도시가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고 도대체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비 오는 날이면 지하에서 광대 얼굴을 한 의문의 존재가 나타나 어린 아이들을 데려가고, 알고 보면 지구는 매일 밤 외계인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는데 그 사실을 눈치 챈 한 남자가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 참으며 달려간 세상의 끝은 그저 하수구 맨홀 같은 깊고 어두운 무저갱일 뿐입니다. 어느 날 하늘을 뒤덮고 내려온 파충류의 모습을 한 신들이 누군가의 창가에 나타나 얼굴을 꼭 붙인 채 말을 걸기도 하고, 언제나 어린 아이들은 숲으로 걸어 들어가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노인의 낯빛을 한 채 산에서 내려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누군가의 꿈에 불과하며 그들은 등에 파이프가 꽂힌 채 자기가 진짜로 살아있다는 착각에 빠져 잠을 자고, 어떤 검고 거대한 컴퓨터가 그렇게 꿈꾸는 존재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작동시키고 있다는,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홀로그램일 수도 있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이야기들. 마치 무언가에 들린 존재처럼, 우린 그런 이야기들을 미친 듯이 빨아들여 자신의 두뇌에 이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안에서 뒤섞이고 자라나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됩니다. 그 와중에 어떤 이야기는 영원히 소멸되고-그래서 지구상에 살아 있는 그 어떤 인간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게 되고-또 어떤 이야기는 수만,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어딘가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반복됩니다. 이런 이야기들, 지금 당장이라도 주위를 둘러보면-아니 그럴 것도 없이 그저 잠깐 눈을 감고 떠올려보기만 해도 될 겁니다. 당신 머릿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이식되어 있는지-찾을 수 있는 그 기이한 생명력. 대체 그들은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기에, 그 장대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흔들림을 그리도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다음의 누군가에게로 전달될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까지나 미지(未知)에 속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의 자발적인 숙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분명 무척이나 즐겁고 다행스러운 일 중의 하나일 겁니다.

김희선


《무한의 책》 심사평 중에서

토머스 핀천을 생각나게 하는 실험적인 형식, 한국 현대사와 이민자들의 삶을 분열적인 인물과 SF적 요소에 담아내려고 한 대담한 시도가 발군이었다.

- 송경아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게 여러 인물과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짜 넣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 고호관


평행우주, 시간여행 등 SF적 모티프와 소재를 자유롭게 활용하면서도 음모 서사, 아포칼립스 서사, 해석망상 등 다양한 서사양식을 정밀하고도 능숙하게 결합시키는 역량이 대단한 작품.

- 복도훈


장편소설 부문 우수상 - 홍준영 《이방인의 성》

“당신들은 낙원처럼 꾸며진 오래된 미래에 도착했다.”

소설을 다 쓰고, 인터넷 선전을 위한 배너의 선전용 표어를 고민하다 떠오른 말이다.

[이방인의 성]은 내가 쓴 소설이지만 정말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게 꼬인 플롯의 소설인지라(사실 평소 정리를 잘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표어만큼이나 소설을 함축해 잘 정리한 말은 없을 거 같다.

[이방인의 성]은 기본적으로 아나크로니즘 계열의 소설이다. 아나크로니즘이란 시대가 어긋난 형상이 자주 보이는 장르를 뜻한다. 복고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SF 장르적 해석을 더하면 기시착오적記時錯誤인 미래상을 말하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소설적으로 보면 스팀펑크 계열이나 사이버 펑크 그리고 대체역사가 이쪽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내 소설은 세 장르 모두를 아울렀다.

어쩌면, 나는 내 삶보다 오래된 고전문학들을 차용하고 덧대어 창조하며,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 앤티크처럼 문장을 꾸며내며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문학적 정체성 정도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 그자체일 수 있었다. [이방인의 성]은 나의 이런 강박적인 서구 고전소설들의 존경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편집증적인 천착이 주가 된 작법이었지만, 만족스런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였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여, 이번 수상은 매우 기쁘고 기분이 좋다. 책의 저자로써 이 책을 읽은 모든 분들이 내가 느꼈던 감격을 함께 느껴주셨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 작품으로도 만나 뵐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방인의 성》 심사평 중에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팀펑크 창작물에 조선왕조가 동아시아의 맹주인 기술 강소국으로 자리 잡는다는 흥미로운 대체역사를 접붙인 상상력이 호쾌했다.

- 송경아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스타일의 대체역사와 스팀펑크 작품이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조선을 스팀펑크의 배경으로 만들어낸 신선함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 고호관


문장은 약간 거칠었지만 자신감이 넘쳤고, 선과 악에 이르는 캐릭터 형상화에는 집중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곁가지를 쳐내고 바로 사건을 만들어 진입하는 솜씨가 좋았다.

- 복도훈




심사위원장/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송경아

이번 SF어워드 장편부문 심사대상작들을 읽으면서, 전반적으로 한국 SF의 수준이 매우 성숙하고 있음을 느꼈다. 심사대상작의 수가 껑충 뛰었을 뿐 아니라, 매우 실험적인 소설 형식부터 전통적인 서사 형식, 발랄한 패러디에서 스팀펑크나 묵직한 사변소설까지 아우르는 저변이 넓어지고 작가들의 상상력도 한층 자유로워졌다. 특히 올해 심사작에는 SF와 스릴러가 결합된 작품이 많이 보였지만, 전반적으로는 하드 SF의 작법에 충실한 작품부터 SF적 요소가 섞인 영어덜트 소설이나 웹소설까지, 현란하고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의외로 소수자를 다룬 SF 작품이 적었다. 한국의 SF 작가들이 흡수한 선대의 SF는 아시모프, 클라크, 하인라인의 SF이기도 하지만 메리 셸리부터 르귄, 앳우드, 팁트리의 계보를 잇는 SF이기도 하다. 다음 심사에는 형식뿐 아니라 내용과 정조(情調)에서도 다양성을 확보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 바란다.

한편 이런 다양성은 한국 SF가 안은 오래된 물음, “<은하영웅전설>은 SF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어디까지가 SF이고 어디까지가 SF가 아닌가? SF적 요소를 담고 있는 소설은 무조건 SF인가? 스페이스 오페라는 SF인가, 의상만 우주복으로 갈아입은 해양모험담인가? <스타 트렉>과 <스타 워즈>는 SF인가 아닌가? SF와 스릴러의 콜라보레이션은 SF인가 아닌가?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와 얼마나 겹치고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아동/청소년문학에서 과학-사회적 문제들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 이런 물음 앞에서, 우리는 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만 SF로 편입시키고 SF적 요소와 다른 장르적 요소를 활용한 평범한 작품들은 다른 장르로 밀어내 버리려는 아집을 부리게 되지는 않을까? 여러 가지 숙제를 던져준 심사과정이었다.

쉽지 않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심사과정이 그렇게 험난하지는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에셔의 손』을 대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적지 않은 인물들이 무리 없이 연결되며 사건을 이끌어 나가고, 전뇌와 가상현실, 네트워크라는 소재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가 어떻게 도구에 그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사용자를 바꾸어내는, 손을 그리는 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존재와 기술, 기억과 인간의 존재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섣부른 기술결정론이나 인간성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에 빠지지 않고 서사가 내포한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힘도 훌륭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이방인의 성』도 우수상으로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팀펑크 창작물에 조선왕조가 동아시아의 맹주인 기술 강소국으로 자리 잡는다는 흥미로운 대체역사를 접붙인 상상력이 호쾌했다. 다만 비중 있는 여성 인물이 마지막까지 능동적인 활동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면과, 테러단체나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악당이 가진 사상적 배경이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무한의 책』은 토머스 핀천을 생각나게 하는 실험적인 형식, 한국 현대사와 이민자들의 삶을 분열적인 인물과 SF적 요소에 담아내려고 한 대담한 시도가 발군이었다. 그러나 현란한 실험성을 덜어내고 볼 때 속죄와 지구 구원이라는 서사가 역사의 남성 피해자들, 즉 아버지-아들의 계승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인 틀에 한정된 것이 아쉽다. 더욱 입체적인 서사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알렙이 알렙에게』는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진 작품이었다. 복제인간을 소재로 쓸 때 등장하기 쉬운 인간성 유무의 갈등, 즉 ‘진짜 인간/가짜 인간’이라는 상투적인 대립 구조를 깔끔히 비껴갔을 뿐 아니라, 인물과 사건들이 균형 잡힌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과학적 경이감을 주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지 못하고, 작품의 세계관에 익숙해지자마자 짐작할 수 있는 전개 범위와 한계 안에서 그쳤다.

『러브비츠 평전』은 평전 형식을 빈 인공지능 창작 시대의 음악-문화론으로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후반부 서사의 비약, 서사 전개상 꼭 필요했는지 의심스러운 선정적인 폭력 장면 등이 작품의 격을 스스로 낮추어 안타깝다.

『저 이승의 선지자』는 협의의 과학소설이라기보다 자아와 타자, 합일과 분리라는 화두를 붙들고 풀어가는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물론 과학소설이 어떤 내용적·형식적 틀을 고수할 필요는 없으나 이번 장편 심사에서는 좀 더 친숙한 ‘과학소설’에 가점을 주었다. 이것은 위 총평에 쓴 고민과 맞물린 지점이다.

『창백한 말』은 장르문학으로서 매우 매력적이고 흡인력 있는 작품이었으나, 역시 ‘좀비물은 SF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마주치게 된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가 SF인 까닭은 좀비를 바이러스의 희생자로 설정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좀비를 극복-치료하려고 애쓰는 주인공의 역경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백신/곤경에 처한 인간들의 탐욕 등 몇 가지 관습적인 요소에만 기대어 서사를 전개한다면 좀비물은 SF라기보다 호러 스릴러로 보아야 한다.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고호관

많은 작품 중에서 우수한 몇몇 작품을 추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각 작품이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갖고 있을 때는 특히 그렇다. 예심에 올라온 작품 중 기본기가 부족하거나 SF로 분류하기 어려운 일부를 제외하면 상당수가 제각기 장점을 갖고 있었다.

가장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제는 성격이 서로 다른 작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방법이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SF와 일단 성인 대상의 SF를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 다른 장르와의 경계에 놓인 작품과 그래도 SF의 본질을 붙잡고 있는 작품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까. 예를 들어, 잘 썼지만 SF의 흔한 도구를 활용한 데 그친 작품과 완성도는 다소 부족해도 SF만이 나타낼 수 있는 주제의식에 집중한 작품이 있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대상으로 선정한 ‘에셔의 손’은 이런 고민을 많이 덜어주었다. 완성도와 주제의식의 표현, SF적인 설정과 디테일 모두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사이에 큰 이견 없이 대상작으로 꼽혔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기존 SF에서 많이 다룬 소재로 자칫하면 식상하기 쉽지만, 클리셰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빚어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도록 풀어나간 솜씨도 훌륭했다.

우수상을 받은 ‘이방인의 성’은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스타일의 대체역사와 스팀펑크 작품이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조선을 스팀펑크의 배경으로 만들어낸 신선함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다양한 소재와 아이디어를 거침없이 풀어나가면서도 끝까지 서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우수상 수상작인 ‘무한의 책’은 일견 읽기 쉽지 않아 보이는 책이지만, 읽다 보면 작가가 짜 놓은 이야기의 정교한 구성에 빠져들게 된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게 여러 인물과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짜 넣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본심에 오른 다른 작품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알렙이 알렙에게’는 짜임새와 SF적인 설정, 재미 등 모든 면에서 어디 하나 빠지지 않았다. 다만 초기 설정 이후 이야기가 예상할 수 있는 틀을 벗어나지 않고 안전하게 전개된다는 평이 있었다. 대상 독자가 어린이인 동화라는 특성에 기인한 것일 수 있어 앞으로 심사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숙제를 안겨 주기도 했다.

‘창백한 말’도 앞서 이야기한 고민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재미있고 뛰어난 좀비 문학만, SF로서의 요소는 다소 약했다. 이 역시 앞으로 더 짚어봐야 할 지점이다.

‘러브비츠 평전’은 아주 독특하고 개성 있는 소설이다. 음악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점도 신선했다. 아이디어 자체는 새롭고 재미있는 부분이 있지만,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성이 아쉽다.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복도훈

시(詩)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시의 정의에 대한 오류의 역사라고들 한다. 물론 T. S. 엘리어트의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시에 대한 정의가 모두 틀린 정의라거나 시에 대한 정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내게 이 말은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정의하고 그 개념의 외연과 내포를 규정하는 작업의 어려움과 섬세함을 함께 고려해야한다는 주문으로 들린다. SF도 마찬가지. 심사위원들은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스물다섯 명의 작가의 작품들을 선별해 예심에 올렸고, 한 달을 훌쩍 넘기는 기나긴 읽기의 대장정을 마쳤으며, 그 읽기의 시간보다 매우 짧은 시간 내에서 큰 이견 없이 대상작과 우수작을 흡족하게 선정할 수 있었다. 심사과정에서 각 심사위원들마다 SF 장르에 대한 각자의 정의와 개념적 범주화, SF 특정 하위 장르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를 표명했지만, 그것이‘이런 작품이면 우리가 SF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느슨하면서도 포괄적인 전제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내‘SF 장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심중으로 어떤 작품이 더/덜 SF다운가, SF답다/답지 않느냐고 할 때 나는 SF를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었는가. 다른 장르와 결합하고 장르를 활용하는 정도에서 어느 작품에 더 큰 관심을 둘 것인가 말 것인가. science fiction이라고 할 때 science는 현실의/가능한 과학기술의 산물이나 가설을 뜻하는 것으로 한정해야 것인가, 심리학과 인류학 등등 학문 일반을 포괄하는 의미로 지칭해야 할 것인가. 결국에는 어떤 SF 작품이, 다른 소설 장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미학적으로 뛰어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숙고와 판단에 의해 다시 한 번 질문되어야 할 질문들.

작년과 넌지시 비교해보았을 때, 확실하게 작품의 양적, 질적 우수성은 올해 들어 눈에 띄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런저런 자리에서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 SF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그 출처의 하나로, 주로 문단 쪽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음…… 하지만…… 이하 생략). 스릴러, 로맨스와 믹싱, 콜라보한 SF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다소 전반적인 특징이었지만, 하드 SF, 스팀펑크, 사변소설, 밀리터리 SF, 아포칼립스 등 하위장르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읽을 수 있어서 양 많고 맛좋은 뷔페식당에 들어선 것처럼 즐거웠다. 게다가 초중반에 읽기를 포기하거나 성의 없도록 만드는(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읽으려고 노력한) 만듦새를 가진 작품도 드물어서 내게는 책읽기의 고통과 즐거움을 한꺼번에 맞본 운 좋은 심사이기도 했다.

우선 본심에 내가 올린 작품은 김희선의 『무한의 책』, 최민호의 『창백한 말』, 김상원의 『러브비츠 평전』, 홍준영의 『이방인의 성』, 김백상의 『에셔의 손』이었다. 이 소설들 가운데 두 편은 이미 내가 해설이나 리뷰를 쓴 작품이어서 본심에 올리기가 조심스러웠지만, 작품의 일정한 성취에 대한 다른 심사위원들의 너그러운 동의와 수용이 있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인 내가 이른바 본격문학의 행성 거주자라는 사실은, 종종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신분적 구속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이 어떤 작품을 심사할 경우에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는 선호도나 편견의 표시로 귀착되지 않으려고 늘 의식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본격문학의 행성에서 출간된(출간되었지만 비평적으로는 별로 조명되지 않은) 김희선의『무한의 책』과 다른 장르의 행성에서 출간된 최민호의『창백한 말』을 중요한 문학적·장르적 성취로 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한의 책』은 평행우주, 시간여행 등 SF적 모티프와 소재를 자유롭게 활용하면서도 음모 서사, 아포칼립스 서사, 해석망상 등 다양한 서사양식을 정밀하고도 능숙하게 결합시키는 역량이 대단한 작품으로, ‘세계없는’ 세계화 시대의 유폐된 젊음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서글픈 성장기, 역사적 트라우마(1980년 5.18)와 속죄에 대한 한편의 진혼곡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장르란 무엇보다도 순혈이 아니라 혼종임을 제대로 증명한 작품이라고 해야겠다(물론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볼 때 SF 장르에 더욱 일관되고 충실하게 서사가 복무하고 있는가의 여부는 남아있겠지만).

『창백한 말』은 포스트-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소설로, 억압적인 시스템(국가와 제약회사의 협치)에 의해 아이를 잃은 미혼모의 분노와 슬픔, 신분계급의 최저선에 자리한 자들의 음모와 복수를 절실하게 다룬 소설이다. 작품 후반부에 다소 우연한 설정과 서두르는 기미가 엿보이지만 내 생각에 지금까지 출간된 국내 좀비 아포칼립스 작품 가운데 최고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을 SF로 봐야하는가 하는 논의가 있을 법한데, 나로서는 협의의 과학기술적 요소는 별로 없지만, SF의 방법론이라고 할 만한 외삽 또는 유추, 즉 가상의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에 대해 논리적으로 일관되려는 설정을 밀어붙이려는 작가의 노력에 넉넉한 점수를 줘도 되지 않을까싶다.

김상원의 『러브비츠 평전』은, 우선 다른 두 심사위원의 유연하고도 넉넉한 인품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작품을 본심으로 올려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며, 그 주장이 그리 어렵지 않게 수용되었기 때문이다.『러브비츠 평전』은 인공지능을 넘어선 인공자아의 시대에 실종된 인공자아 뮤지션인 러브비츠의 행방을 뒤쫓아 러브비츠가 남긴 음악, 그에 대한 파편화된 기록을 평전 형식으로 담아내는 작가 주인공의 모자이크적 글쓰기다(작품 본문의 QR코드나 작가의 블로그에 접속해 음악을 들으면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대한 선호가 없이는 읽기에 어지럽고, 서사보다는 논평(러브비츠 ‘평전’)이 위주이지만 포스트휴먼적 미래인간의 모델과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향방에 대한 성찰은 숙고할 만한 수준을 이뤘으며, 작품에 흐르는 아나키-펑크적 분위기 등은 (내게는) 꽤나 매혹적이었다. 한 평론가의 책 제목을 빌리면, 비교적 잘 표현된 카오스라고나 할까.

홍준영의 『이방인의 성』은, (실례지만) 책 표지만 보고 큰 기대 없이 집어들었다가, 몰입해서 읽은 스팀펑크 소설이었다. 마찬가지로 썩 잘 표현된 카오스 같은 작품이기도 했다. 과연 과학기술의 강성대국인 조선, 18~9세기의 장영실과 경복궁, 궁중 한복이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의 세계와 무리 없이 결합할까, 이렇게 독자가 조마조마할 법한 부분에서 작가는 어김없이 서사적 박력과 정밀한 묘사(와 설명)로 밀어부쳐 기어이 성공시켰다. 문장은 약간 거칠었지만 자신감이 넘쳤고, 선과 악에 이르는 캐릭터 형상화에는 집중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곁가지를 쳐내고 바로 사건을 만들어 진입하는 솜씨가 좋았다. 다만 공력을 들인 만큼 작품의 재미에 문제의식(포스트휴먼적 세계와 테러리즘의 관계 등)도 첨가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 또는 아쉬움을 이참에 덧붙이고자 한다.

김백상의 『에셔의 손』은, 본심에 올린 다른 작품들과 그 성취면에서 나란히 비교되면서도, 돌올한 면모가 하나 더 있었다. 본심에 올린 작품 대부분 SF 장르의 설정이나 형식에 비교적 충실했다. 그럼에도 적어도 이 정도가 한국 SF가 성취할 만한 높은 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지평선에서 출발해 하나의 희미한 점이었다가 점점 균형 잡힌 크기와 매력적인 생김새를 갖추고 다가온 보기 드문 작품이 있었다. 그게 『에셔의 손』이었다. 전뇌동기화라는 포스트휴먼적 세계의 설정을 통해 기억과 정체성,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 등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네트워크 세계의 음모와 투쟁과 직결시켜 추리소설적 플롯으로 한 땀 한 땀 연결해나가는 솜씨는 소설 내내 일관되었다. 다소 드라이한 세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설에 등장하는 전뇌인간 대부분 드라이하고 쿨하지만, 유려한 문장 속에 녹아든 주인공들의 우수와 고독, 상호 단절의 느낌은 내겐 꽤나 매혹적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에셔의 손』을 읽던 즈음에 성격이 다르지만 테드 창의『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도 읽었다(물론 테드 창!). 뭐야,『에셔의 손』이 훨씬 재미있고 더 뛰어나잖아! 언제까지 한국 SF의 지평선에서 외국작가의 이름을 봐야 해? 이젠 그럴 필요가 전보다도 좀 더 줄어들게 되었다. 내년에도 그랬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