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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어워드2020

SF어워드 2020 -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 및 심사평


대상 [테세우스의 배] 이경희

작가소개

[대표작]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2020)/ x Cred/t(2020)/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0)/ 테세우스의 배(2019)/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2019)

[수상] 2020년 황금가지 작가 프로젝트 당선/ 2020년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 당선/ 2019년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당선


작품소개

불의의 사고로 온몸이 기계가 된 채 눈을 뜬 남자 ‘진환’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초거대기업 트라이플래닛의 회장이라는 사실 뿐이다. 지문도 유전자도 남지 않은 기계의 몸으로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우수상 [무너진 다리] 천선란

작가소개

[대표작] 어떤 물질의 사랑(2020)/ 천 개의 파랑(2020)/ 무너진 다리(2019)

[수상] 2020년 안전가옥×메가박스 스토리 공모전 당선/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대상


작품소개

근미래의 2087년, 우주비행사 아인과 그를 보좌하는 안드로이드 ‘위투’와 ‘사라’는 우주선 ‘펄서’를 타고 제 2의 지구 ‘가이아’를 향한다. 하지만 3년 후 유성과 충돌하며 우주선이 파괴되고 ‘아인’은 가까스로 구조 비행선에 태워져 지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데, ‘아인’은 그로부터 12년 후 오직 뇌만 간직한 채 안드로이드의 모습으로 눈을 뜨게 된다. 그런 아인에게 임무가 내려진다. 핵엔진 추락으로 폐허가 된 아메리카 대륙에 보낸 안드로이드를 조사하고 오라는 명령이다. 아인은 그렇게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아메리카대륙으로 향한다.


우수상 [유령해마] 문목하

작가소개

[대표작] 유령해마(2019)/ 돌이킬 수 있는(2018)

[수상] 2019년 SF어워드 장편소설부문 우수상


작품소개

여러 인공지능을 한 데 이어주는 범용 지능틀인 '비파'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며 일상을 보내던 중 어느날 함정질문을 받는다. 답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질문인 걸 알지만, '비파'는 답을 찾아내도록 태어났으므로 함정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 미치지 않기 위해 답을 찾아 헤매던 '비파'는 우주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고를 계기로 한 인간을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고, 그녀가 자신의 함정질문에 답을 내려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는다. 결국 위험한 결단을 내린 '비파'는 그녀를 찾아갔다가 어떤 진실을 마주하고 더 막막한 벽에 부딪히게 되는데......



장편소설 부문 심사평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장

이유미



올해도 장편 부문의 대세는 인공지능이었다. 작년도에 심사한 작품들 가운데 1/3 정도가 이 주제를 거론했다면, 올해는 큰 비중으로건 작은 비중으로건 인공지능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기가 오히려 더 힘들 정도다. 발목 근처를 스치는 다채로운 잡초밭과도 같았던 이 주제는, 올해 허리춤까지 쑤욱 올라온 수초밭의 느낌으로 우거졌다. 무성하고, 빽빽하며, 감탄스러울 정도로 활기가 넘친다. 특히 올해 인공지능을 중심 주제로 삼은 작품들에서는 인간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가 거의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반복적으로 다루어졌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초래하는 자아 정체감의 위기는 주제를 갈아타며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문제이기는 하다. 인공지능이라는 테마에 있어서는, 유일한 지적 존재로서의 인간 위상을 흔드는 것이 외부의 그 무엇이 아니라 직접 만든 인공물일 수 있다는 초유의 사실이 기술적 가능성 너머로 보다 근원적인 존재론적 질문을 촉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주제에 대한 고민의 속도와 방향이 비슷비슷하다 보니 작품 간 변별력이 떨어지는 역효과가 빚어지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동시다발적인 심화와 성숙은 SF 장르의 현재적 생동을 보여주는 지표로 읽힌다. 이를테면 이 전년도 상당수 작품이 인공지능을 대하는 태도에서 생경한 것에 대한 막연한 타자화 경향이 읽혔었는데, 올해는 좀 더 적극적인 조화와 융합 시도가 눈에 띄는 식이다. SF적 집단 상상력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상상력이 어느 날 훅 치고 들어온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 개념을 다루는 법을 서툴게 익혀나가고, 그러면서 생겨난 익숙함을 토대로 사고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왁자지껄한 흐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우리가 서로의 팔을 겯고, 거인의 어깨 위로 바지런히 등반하고 있다는 실감이.  


인공지능이 촉발하는 인간 자아와 정체성 위기를 다룸에 있어 <테세우스의 배>는 개중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작품이었다. 정체성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AI 기술의 응용사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정해놓고, 하나의 사건 흐름 속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화합하게끔 배치해놓고서 각각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고찰해나간다. 육체가 나인가, 정신이 나인가, 복제된 정신도 나일 수 있는가? 인간 정체성이라는 개념의 복잡성, 그 화두가 독자들에게 안기는 숙제의 크기를 생각할 때, 이처럼 단순화된 분류와 접근방식은 단점이 아니라 미덕으로 작용한다. 장르 소설이 무거운 철학적 사유를 다룰 때 어디에 힘을 주고 어디서 힘을 뺌으로써 독자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깔끔하게 판단하고 취사 선택한 영민함이 돋보인다. 절제와 단순화로써 성취된 것은 좋은 SF 소설다운 균형,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통합적인 완성도이다. 과학적인 정합성 위에 철학적인 문제의식, 탄탄한 문장, 그리고 영화적이고 오락적인 재미까지 골고루 갖추면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재미로만 치우치지도, 철학과 사변으로만 치우치지도 않으며, 성실하게 닦인 문장에는 ‘소설’ 본연의 매질인 언어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있다. 장면 장면의 연출도 생생하고 속도감 넘친다. 특히 철학적인 주제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변에 함몰되어 직설적으로 설파하는 함정에 빠지는 대신, 침착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서사 안으로 매끈하게 녹여내는 솜씨가 경탄을 자아낸다.    


시놉시스가 아닌 ‘장편소설’의 심사임을 감안할 때, 서사와 연출뿐 아니라 글 자체의 단단함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유령해마>는 SF적 상상력과 읽는 재미를 모두 갖춘 데 더해 올해 후보작들 가운데 가장 문학적 성취가 높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는 2인칭 대명사 ‘너’를 주어로 채택한 과감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너’는 기본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에, 주어의 자리에 들어갈 경우 주관적인 서술어들과 껄끄럽게 마찰하기 십상이다. 때문에 주어의 자리에 선호되는 체언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요 주어 ‘너’에서는 희한하게도 이물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화자인 해마가 설정상 ‘너’에 관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전지적 관찰자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문장의 구조적인 형태가 스토리의 핵심관념에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흡입력을 빚어낸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를 기막히게 보완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느 한 단어도 허투루 쓰지 않은 문장들이 세공되면서, 문학성과 장르적 매력을 동시에 고취하는 데 성공했다.


작년도 우수상 수상작인 <돌이킬 수 있는>에서도 보여진 문장과 서사 간 텐션의 조율이 더 노련해지고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인상이다. 특히 공들여 조탁해낸 수고로움이 느껴지던 전작 대비 자연스럽게 힘을 뺐지만 밀도와 아름다움은 그대로 보전한 문장들의 편안함이 좋았다. 흥미진진한 서사, 생생한 장면 연출, 개성 강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 등 기본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그 어떤 미래적인 배경과 설정 속에도 매우 현재적인 사회의식-빅브라더, 언론문제, 소수자 차별 등-을 은근하고 세련되게 펼쳐내는 솜씨에도 크게 갈채를 보낸다. 


<무너진 다리>는 집요하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섬세한 작품이다. 인공지능과 지구 멸망이 동시에 주어지는 극단적인 설정 속에 다양한 존재 양태를 던져 넣고 인간성의 면면을 속속들이 이해해내고자 부단하게 파고든다. 특히 인간적인 외피(살과 피로 이루어진 신체) 안에 인공지능이나 개별 인간 고유의 기억을 융합시켜서 만들어지는 새롭고 다채로운 존재들에 관한 상상은 올해 SF어워드에서 심사한 수많은 인공지능 소재 작품들에서 흔하게 나타난 시도였으나, 이 작품이 각각의 존재 양태를 상상하고 굴리고 파고들 때의 끈질김과 치열함은 경외감이 들 정도다. 


작가는 광활한 수폭을 펼쳐놓고 이쪽 모서리에 한국을, 저쪽 모서리에 아메리카 대륙을, 그리고 저 반대편에 우주를 배치해놓고, 그 위에 다양한 지성적 존재들과 사건들을 첩첩이 배치해 촘촘히 수놓음으로써 태피스트리 자수 같은 작품을 완성시켰다. 방대한 스케일과 미시적인 정서를 동시에 아우르는 솜씨가 탁월하다. 지구와 우주, 바다의 이편과 저편,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숨 가쁜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얼마나 깊고 다각적인 고민을 통해 주제와 인물들이 형상화되고 있는지가 잡힐 듯이 와 닿는다. 한 줄 한 줄 문장의 밀도가 그만큼 높다. 아름답게 제련되기보다는 깊이 곱씹어 단전에서부터 밀어 올린 것 같은 문장들이다. 표면에 군데군데 투박한 매듭이 흩어져 있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거칠거칠한 질감이 오히려 특유의 문체를 성립시킨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사람이든 아니든, 모든 인물이 가슴 아플 만큼 섬세하게 그려지는 것도 이 작품의 특별한 지점이다. 그렇게 그려진 인물들이 험하고 극단적인 배경 안에 놓였을 때 생겨나는 처연한 정취가 있다. 전쟁, 폭발, 파괴, 추격 등 긴박감 넘치는 장면 안에서도 이 정취는 지워지지가 않는다. 주제에 천착하는 치열함과 더불어, 끝까지 숨죽이고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이 거기서 나온다.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김주영



해마다 더 다양한 작품을 SF 울타리 안으로 수용하면서 한국 SF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추세가 반가운 심사였다. 이런 추세에 반해 디지털화된 뇌의 복제, 인공지능, 인공신체 등 최근 사회에서 꾸준히 화제로 삼는 소재에 편향된 점이 큰 아쉬움을 남기도 했다. 소재가 유사한 탓인지 주제 면에서도 물리적·전자적으로 확장된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SF에 등장해온 기술이 실제로 구현되기 시작한 시대의 영향으로 SF적인 상상력이 한정되는 역설적 현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정도 구축된 세계관을 가져와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이기는 하지만, 이런 선택이 작품의 차별성을 많이 지워버린 점이 씁쓸함을 남긴다.


많은 작품에서 현실과 큰 차이가 없는 사회상이나 가치관이 등장하는 점도 아쉬웠다. 인종과 젠더 등의 주제와 관련된 관점 변화가 현실에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인간의 물리적·전자적 확장이나 영생 달성, 각 분야에서 등장할 경이로운 기술은 이러한 인식의 변곡점을 계속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가 가진 많은 가치관이 도전받을 것이고, 폐기되거나 새로운 가치관으로 교체될 것이다. 심사 대상이었던 SF에 등장한 인물들은 대부분 이런 흐름이 강렬하게 지나간 사회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많은 인물과 사회가 2020년의 가치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고정관념을 바탕에 두고 창조된 전형적인 인물들,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하는 여성관과 이를 반영한 불필요한 성적 판타지나 여성에 대한 환상, 여러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행동방식 등에는 많은 안타까움이 남는다. 


공교롭게도 수상작들 역시 많은 작품이 선택했던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장을 펼치며 이에 관해 가졌던 우려는 빠지기 쉬운 전형성의 함정을 피해가며 정교하게 구축한 세계를 만나는 순간 사라졌다. 수상작들은 비슷한 소재도 작가의 개성과 역량 속에서 얼마든지 다양하고 훌륭하게 변용될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경이로움과 더불어 한국 장편 SF의 지속적 성장과 풍요로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테세우스의 배』는 사이버펑크의 매력을 계승하며 인간이 물리적·전자적으로 확장된 시대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대기업 경영권 다툼과 결합해 다루고 있다. 경영권을 되찾아만 하는 중차대한 상황 속에 놓인 진환은 셋으로 분화되어 있다. 각 진환의 특징은 기계 몸, DNA로 복제된 몸, 오리지널에 가장 가까운 메모리이다. ‘셋 중 누가 진짜인가’라는 문제는 ‘분화된 것들은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분화된 것은 이미 본질에서 멀어졌고, 남은 방법은 본질과의 유사도를 따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등장하는 것이 ‘자기 동질성 검증’ 알고리즘이다. 기술을 매개로 하여 현실화한 분신술에 그치지 않고 분화한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환원주의로까지 뻗어 나간 작가의 아이디어가 경이롭다. 또 다른 경이로움은 고유한 세계를 구축해 나간 설정의 섬세함에서 온다. 아이디어를 펼치는 과정에 등장하는 스마트팜, 블록체인 가상화폐, 뉴럴링크 등의 다양한 기술과 그에 관한 주석들은 작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한 땀 한 땀 세계를 구축해 나아갔는가를 보여준다. 과학과 공학을 주축으로 구성하는 SF에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놓치지 않은 작가의 성실함이 인상 깊다. 정교한 설정과 더불어 긴박하게 이어지는 사건과 반전이 흡입력과 함께 읽기의 즐거움까지도 충분히 제공한다는 점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유령해마』는 모든 인간이 네트워크와 연결된 시대 속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을 ‘해마’라는 이름으로 다룬다. 해마는 인간을 기억하고, 추론하여 행동하며 돌본다. 현실이라면 네트워크상에서의 개인정보 노출과 인공지능의 침범이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지겠지만, 관점을 비틀어 인간을 초월한 영역에서의 돌봄으로 바라보는 점이 개성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전능한 존재의 사랑과 보호에 대한 환상과도 연결된다. 인간이 물리적으로 속할 수 없는 네트워크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인간들의 필요를 채우는 해마들의 세계는 인간적인 신들이 살았던 올림퍼스를 연상시킨다. 자신과 독특한 사건으로 얽힌 미정에게 집착하는 해마 비파는 인공지능이면서도 오히려 발랄하고 제멋대로인 인간적인 모습을 개성으로 지니고 있다. 올림퍼스의 산 대신 네트워크를 오가며 미정을 관찰하고 관계하며 인간적으로 반응하는 해마, 비파의 매력을 끝까지 유지하며 현대적 신화를 SF로 완성한 점이 인상 깊다.


『무너진 다리』는 아포칼립스가 눈앞에 닥친 풍경을 그리며 그 속을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을 그린다. 재난 속에서 대비되는 인간과 휴론,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반란군의 갈등이 혼란하게 섞이다가 결국 인물들의 이야기가 파편화되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가 끝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 창조한 휴론이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다는 섬뜩함 속에는 감정을 비롯한 고유한 인간의 특징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한 사유를 담아내는 차분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이 인상적이다. 배경이 되는 재난 상황에 관한 설정을 촘촘한 밀도로 설득력 있게 채워나간 점도 마찬가지로 인상 깊다. 

탄탄하게 구축된 재난 상황 속에는 생존의 다리를 무너뜨리는 이기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이 있다. 전형적인 생존기나 영웅담으로 흘러갈 수 있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대신 각 인물의 서사를 집요할 만큼 따뜻하고도 깊이 있게 살피며 인간과 삶을 성찰하고 사유해 나간 점에 찬사를 보낸다. 


평가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것은 중압감과 함께 큰 고역이었다. 심사결과와 별개로 모든 작품에 매료되는 지점이 있었음을 전하고 싶다. SF 독자의 한 해를 풍요롭게 만들어주신 모든 SF 작가님들께 감사드린다.






장편소설 부문 심사위원
임태운



  올해 쟁쟁한 후보들 가운데 대상작은 가장 먼저 정해졌다. 심사위원 전원이 이경희의 [테세우스의 배]를 대상작으로 꼽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올해 심사작 중에서 ‘신체를 가진 인공지능’과 ‘디지털 세계에 의식이 업로딩된 인간’의 대립이 절반 이상의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었는데 거꾸로 말해서 이 싸움터가 그만큼 레드오션이었다는 뜻이다. 동시대 작가들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소재를 택했음에도 작가가 그 재료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큰 신뢰감을 주었다. SF소설에서 소재가 차지하는 비율이 물론 높다지만 그 재료를 불판 위에 올리고 화력을 조절한 다음 조미료를 추가하고 토핑을 고르는 솜씨 역시 스토리텔러의 중요한 책무다. 그런 면에서 [테세우스의 배]는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정교한 플롯과 끈질기게 화두를 물고 늘어지며 인물에게 몰입하도록 하는 솜씨가 압권이었다. 인간의 신체 존엄성이 휘발된 세계를 파고드는 ‘사이버펑크’는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메뉴판에 추가하고 싶어하지만 막상 도마 위에 올린 후 손질해보려 하면 ‘비닐 하나 벗기기 까다로운 생선’ 같은 하위장르다. 훌륭한 쉐프에게 대접받은 포만감의 심정으로 이경희의 [테세우스의 배] 대상 수상을 축하한다. 맛있는 걸 먹으면 ‘이 식당 곧 맛집으로 소문나 층수 확장하겠구나’ 싶어지지 않나. 머지않아 [테세우스의 배]란 이름이 개봉 예정 영화 목록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스트 중 하나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문목하는 [돌이킬 수 있는]이라는 데뷔작으로 국내 SF계에 태풍과도 같은 센세이션을 불러온 작가다. 이번 작품 [유령해마]의 프롤로그를 독파한 순간 이 열풍이 당분간 멈출 일이 없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일단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유령해마]는 인공지성체 ‘해마’의 1인칭 서술로 톤 앤 매너를 구축하며 독자로 하여금 심호흡을 들이키게 한다. 인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주체를 1인칭으로 다루겠다는 야심을 초반부터 드러내는 것이다. 극도로 어려운 악보를, 가장 현란한 기교로 소화하겠다는 피아니스트의 예고장을 받는 기분이었다. 중간부터는 한 문장, 한 글자도 허투루 넘기면 큰일 날 것 같은 긴장감과 흥분감을 주었으며 흐트러짐 없이 한 방향으로 인물들을 이끌고 나가다가 결말에 준비된 한 방을 터트린다. 전작보다 한층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전개 솜씨는 물론, 여전히 책장을 덮자마자 가슴을 움켜잡게 만드는 미려한 결말이 있다. 연타석 홈런을 쳐낸 4번 타자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런 경지를 선보인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엔딩장인’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


  천선란의 [무너진 다리]는 일단 이야기를 풀어내는 감성 면에서 독보적이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닮지 않았으나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본심은 물론 예심작을 통틀어 가장 많은 등장인물을 무대 위에 올려놓은 데다 사건의 밀도 또한 높은데 결말까지 달려가게 만드는 힘이 바로 그 ‘감성’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대립’, ‘태양계 외부로의 이민’ 등 다양한 소재들이 서로 결합하는 이야기다. 자칫 이야기의 초점이 흐릿해질 수 있는 함정을 집요한 뚝심으로 돌파해 나간다. 소설의 중반을 넘어가는 순간 독자는 ‘이 작가가 테마를 붙잡고 정말 끝까지 가보려 하는구나’하는 예감이 들게 되며 수천 번 고민한 흔적이 담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즐거운 예감이 들어맞는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천선란은 이 심사평이 공개되는 시점에 이미 차기작 장편소설과 개인단편선까지 대중에게 선을 보인 괴물신인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낯선 감성으로 이미 우리 안에 오래 머물고 있던 익숙한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작가의 등장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수상작을 세 작품으로 좁혀야 한다는 것에 심사위원 전원이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을 정도로 최종심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차무진의 [인더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를 덮친 재난 속에서 병든 아들을 가방에 넣고 국토를 횡단해야 하는 한 사내의 묵시록. 이렇게 짤막하게 요약하기가 죄스러울 정도로 [인더백]의 묵직한 주제의식과 숨 막히는 서스펜스는 대단한 경지를 이룩했다. 서른 편이 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심사위원의 처지를 망각해 버린 채 시종일관 ‘으아,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후루룩 읽은 수작이다. 독자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박진감과 압도감에 대해선 심사위원 전원이 공감했다. SF라는 장르에 대한 집중적 탐구라는 면에서 [무너진 다리]와 치열한 경합을 펼친 끝에 아쉽게 선정되지 못했지만, 그것은 뛰어난 래퍼와 오페라 가수의 경연처럼 공연장과 무대의 미세한 차이가 낳은 엇갈림이었다 생각된다. 더 많은 독자가 [인더백]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쉽지 않았던 심사기간 동안 받은 충만한 위로에 대한 감사를 이 심사소감란을 통해서나마 차무진 작가에게 꼭 전하고 싶다.




koreasf.awar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