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SF 어워드 심사위원 제안을 받은 것이 네 차례가 되었습니다. 심사위원단 전원이 동의하시겠지만 결코 쉬운 자리는 아닙니다. 해마다 SF 발표작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고 작가들의 화두와 개성도 다양해지고 있으며 작품들이 구축하는 세계의 무기 역시 다채롭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 어워드 심사를 매년 덥썩 덥썩 수락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짜릿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경이로운 세계를 펼쳐보이는 작품에 감탄하고, 동료 작가로서 창작자들의 곳간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심과 본심에서 치러지는 심사위원들간의 치열한 난상 토론과 반박, 장르에 대한 의견 재정립 등이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 무엇이 다를까요. 아주 쉬운 답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분량입니다. 20분이면 후루룩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과 달리 장편소설은 2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정독할 수 있는 지면을 작가가 확보한 상태입니다. 때문에 단순한 장르적 아이디어나 활어처럼 펄떡이는 소재의 신선함 만으로는 뛰어난 경지를 구축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장편소설 작가가 이 활어를 손질하는 ‘장인의 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넓은 범위로 확장해나가는 플롯의 마력, 혹은 화두를 가진 인물이 이야기를 돌파하면서 성장하거나 파멸해나가는 캐릭터의 곡선이 있겠지요.
예심에 오른 73 편의 작품 중에서 본심으로 올라가는 15 편의 작품이 구분되는 지점의 또렷함은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 내 장편소설의 뚜렷한 경향은 ‘분량이 적어지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원고지 매수로 1,500매 내외였던 장편소설의 개념은 점점 유연해져서 이제는 장편소설 500매 내외의 작품들도 만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는 두꺼운 서사를 부담스러워하는 독자들의 경향을 무시할 수 없는 출판계의 동향에서 비롯된 현상이기도 합니다. 작가에게는 숙제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기도 하죠. 어쩌면 이전보다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지면이 좁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것을 돌파하려는 수많은 작가들의 시도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이제부터 3시간 가까운 본심을 거쳐 선정된 수상작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수상 수상작인 단요 작가의 [목소리의 증명]은 SF의 아이디어를 청소년 성장소설에 녹여 넣은 수작입니다. 청소년소설은 SF의 아주 가까운 친척입니다. 우리가 대체 몇 살 때 SF를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떠올리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옵니다. 자아의 바깥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우리는 우주로 여행을 떠나고 해저세계를 엿보고 시간여행의 애수를 탐닉하잖아요?
[목소리의 증명]에서는 어릴적 사고를 입은 뒤에 자신 외에 2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증상을 겪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종종 파괴적이고 종잡을 수 없지만 때로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2호,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며 늘 중재자 역할을 하지만 섬세한 3호,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서 대체 왜 내 안의 목소리들이 셋으로 나뉘었나를 밝혀내려 하는 1호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 장편소설은 한 명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세 친구의 모험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내면의 불협화음과 다투며 화해를 반복하는 평범한 이야기에서 SF 장르적인 도약을 멋지게 이뤄낸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미덕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SF 소설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청소년소설이기도 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상처 없이 수확한 이 사냥꾼의 화살에 경탄을 보내드립니다.
또 다른 우수상 수상작인 서윤빈 작가의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은 흥미롭게도 본격 연애소설입니다. 통상 장르물로서 소비되는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겪어내는 인물들의 내면에서 어떤 화학작용이 벌어지는지 관찰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 그 연애소설 말이죠. 이것은 예심과 본심을 통털어 무척 보기 드문 소재라서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인류의 수명이 임플란트로 인해 극적으로 늘어나버린 이 작품의 세계에는 ‘가애’와 ‘수애’라는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OTT 서비스를 구독하다가 지갑에 허덕이듯 이 작품의 인류는 장기 임플란트 구독 서비스에 의존하다가 그것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쯤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확정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마지막으로 함께 해줄 연인을 찾습니다. 바로 그 연인이 ‘가애’이며 그들이 전략적으로 찾아서 접근하는 공략 대상이 바로 ‘수애’입니다.
마치 우리가 문학청년 시절에 한국을 뒤흔들었던 현대 연애소설들이 SF의 장치로 세련되게 부활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장르를 택했다면 작가의 승부수는 좁혀지게 되는데요. 캐릭터들의 대사에서 사랑의 질척거림과 죽음의 냉엄함을 포착해내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은 무척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제가 반했던 지점은 근미래를 다루는 SF 작품들이 늘 소원하지만 이루기는 어려운 영역, 정말로 이런 미래가 곧 찾아올것만 같은 섬찟함을 잘 드러낸 점이었습니다.
최종 대상으로 선정된 박애진 작가의 [히아킨토스]는 참으로 기막힌 작품입니다. SF 작가들 사이에선 작가 지망생들에게 ‘제발 성인용 안드로이드 소재를 아무 생각 없이 쓰지 말아주세요’라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마치 밈화 되어서 주기적으로 SNS를 오가는데요. 초심자들에게는 맛있는 소재로 보이지만 조금만 이 장르를 파고들어보면 그렇게 잠재력이 뛰어난 소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개인적으로 이 화두가 부활하는 계절이 오면 교과서적으로 내밀 수 있는 이 장르의 한국 작품이 없다는 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자. 이제 우리에겐 그럴 아쉬움이 필요없어졌습니다. [히아킨토스]가 우릴 찾아왔으니까요.
이 작품의 세계는 아주 먼 미래입니다. 우주 개척 시대로 접어들어서 인류는 수많은 행성에서 저마다 독특한 정치체계를 구축한 상황입니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행성 ‘유르베’는 제비뽑기를 통해 왕과 왕비, 백작공후의 귀족들을 선출한 채 유희를 즐기는 행성입니다.
이 행성에 한 로봇 공학자가 이주하면서 사교계에 커다란 풍파가 일어납니다. 그 공학자가 만들어낸 처연할 정도로 아름다운 로봇 ‘제로델’이 그 주인공이죠. 제로델의 아찔한 매력은 단순히 외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결핍과 상처를 진정성 있게 어루만져준다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만인의 연인으로 지내오던 제로델에게 치명적인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신부 ‘카이유와’가 등장해 이 복잡한 사건의 폭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이 작품의 성취는 아주 고전적인 소재를, 무척 현란한 플롯으로 되살려내면서,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담론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작품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대체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야? 아아아악!’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몰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까먹으면서 순정 만화를 읽었던 시절을 소환해 준 작가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별들의 전쟁이라 할 수 있었던 본심을 통과해 뽑힌 세 수상작은 모두 SF라는 망망대해 안에서 자기 만의 작살을 다듬어서 대어를 포획해낸 작품들입니다. 심사위원들의 이 무더운 여름을 위로해주었던 이 작품들이 더 많은 독자들의 식탁에 메인코스로 오르기를 바래봅니다.
본심 과정 내내 심사위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작품들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추가해보려 합니다. 위래 작가의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는 코스믹 호러라는 작가 특유의 무기를 풀어낸 작품이었습니다. 위래 작가는 단편 영역에서도 그러했듯 SF 장르 외연을 줄타기하면서도 독보적인 솜씨를 뽐냅니다. 감히 속된 말을 첨언해보자면 ‘정말 힙하기 짝이 없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는 조금만 더 서사가 늘어나서 지금의 지면보다 많은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애타는 갈증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이나경 작가의 [도즈]는 예심에서 제가 본심으로 올린 작품이었습니다. 순간이동 캡슐에서 사랑하는 형이 실종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무려 21년의 시간이 흘러 주인공에게 형이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작품은 세련된 OTT 시리즈물을 보는듯한 장르적 쾌감을 잘 살린 소설이었습니다. 형제의 이야기와 순간이동 이야기가 병행으로 진행되는데 이 둘의 느슨한 연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심너울 작가의 [갈아만든 천국]과 조선희 작가의 [부굴의 눈] 역시 읽는 독자의 혼을 빼놓는 장르물이었습니다. 다만 SF의 색채보다는 각각 판타지, 오컬트 쪽의 색채가 작품을 지배하는 동력이 좀 더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앨런 튜링의 튜링 테스트 이래로 SF에서 꾸준히 다루어 온 화두입니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묻고 싶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이 예견한 인류와 AI의 결합으로 이미 ‘특이점’을 넘어선 신인류가 우리 곁에 있으며,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미래에서 지금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현재의 인간과 미래 인간이 섞여 사는-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잠시 공존하던- 그런 시기에 살고 있을 거 같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건, 일부에는 최신 과학의 미래와, 일부에는 화산 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삶이 그대로 펼쳐질 거 같습니다. 둘은 이미 다른 인류 종일 지도 모릅니다.
올해의 장편들을 읽어나가면서 인간과 인공지능/로봇/신인간+a존재의 구분점, 인간이란 무엇이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매 이야기마다에서 발견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저의 화두였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너무나 외롭고, 친구가 필요하지만 서로 섞이거나 다가가기는 두려워하며, 편리함과 만족감, 이익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타협합니다. 정의로움, 이타심, 공정성, 진정한 사랑, 희생같은 이상향들은 모두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우며 그렇기에 더더욱 소설 속에서 매 순간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히아킨토스-박애진>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빛이 강렬하면 그림자는 한발 물러난 곳에서 더 깊고 크고 장대하게 굽이치며 다채로운 모양과 색을 드러냅니다. 명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자는 검지 않습니다. 빛과 사물의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과 색채를 가지며 사물을 다른 사물과 서로 분리하고 존재의 개성을 강화합니다.
<제로델>은 이 작품의 ‘완벽한 사랑을 주는’ 가장 강렬한 빛으로 존재하며, 그 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여성들의 사랑에 대한 각양각색의 담론은 강렬하고도 다채로웠습니다.
행성마다 다양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가진 우주시대, 중세의 궁전 같은 사회 모델을 추구하는 행성에서, 신부 카이유와는 귀족에게 범죄를 저지른 최초로 ‘시민권’을 획득한 로봇 <제로델>의 실제 범죄유무를 추적합니다.
<시민권>을 획득한 인조인간 <제로델>이 진짜 인간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오래된 화두를, 로맨스와 서스펜스의 백미를 고루 갖춘 세련된 전개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극적인 소재부터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까지 깊은 사유와 통찰을, 작가는 흥미진진하고 새롭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로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작품을 읽는 동안 작중 인물들은 단순히 작가가 빚어낸 캐릭터가 아니라 살과 뼈와 피와 체온과 욕망을 입은 생생한 인간들로 변모했고, 선악을 가를 수 없는 혼돈과 모순과 불안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를 만족시킨, 기능면(?)에서 완벽하고 모순 없이 간결한 <제로델>이 더욱 확고히 비인간적으로 보였습니다.
인간들은 서로 앞다투어 <제로델>이 인간임을 변호하지만 그들의 목소리 없이 <제로델>이 홀로 독립된 인간으로 설 수 있을까. 인간은 개인으로 고유한 조재이지만 사회적으로 소통하며 서로의 존재를 더욱 강화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타인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다면 인격의 고유성은 사라집니다. 작가는 범죄 스릴러의 범인을 잡는 것처럼 확고히 결말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독자에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목소리의 증명-단요>
온전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성장하고 나가 되어 가는가.
주인공 소년은 3개의 인격으로 나뉘어 치열한 내면적 공방을 벌이며 주위환경, 가족, 사건과 대치하고 반응하고 해결하면서 성장하는 이 작품은 다중인격에 관한 오래된 고전 다니엘 키스의 ‘다섯 번째 샐리-다중인격자’를 떠오르게 합니다. 다중인격은 인간의 뇌 진화 과정에서 다중지능 중 누락된 진화의 일부, 의식의 유동성을 연구한 <마음의 역사-스티븐 미슨>에서는 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듣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하고, 최근에는 정신병증이나 뇌과학적으로 활발히 접근되고 있습니다.
작품을 잠시 빌어 오자면 ‘새 휴대폰을 얻지 못해 죽음을 꿈꾸는 아이와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시대였다.’ 통신기기의 발달로 우리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동시에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의 사정을 모릅니다. 우리는 휴대폰 속에서 타인의 삶을 농밀하게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내 의식의 일부로 삼기도 하고 나의 의식을 전달하며 타인을 감염(?) 시키기도 합니다. 너무 깊은 사유와 공감은 때로 현재의 나와 부딪치며 분열적 사고와 착각과 망상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작가는 여기에 SF적 상상력을 보태어 인간에게 직접 인격 삽입술을 시도합니다.
축제와도 같은 기술의 발전과 풍요의 시기가 지난 후, 뒷수습에 골머리를 앓은 인류는 사람을 뜯어고치고 기술을 제한하기로 결정하며 문명재건청을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제 구역 별로 고립되어 다양한 문화적 의료적 시험과 혜택과 차별을 받으며 세상 전체가 철저히 시험대에 올라 멸망에서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문명재건청’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긍정적 방향으로 기술을 선택 지엽적으로 투입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본’과 ‘권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역과 인종과 환경에 따른 현격한 차별이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 문명재건청이 있는 사회는 바로 지금 여기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에게 서로가 은폐된 섬 같은 세상에서 주인공은 섬들을 건너고 자기 안의 유령들을 합일하여 결국 자기 자신으로 성장합니다. 통상 청소년 주인공 소설은 성인에게는 다소 가볍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성장의 갈등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도 쉽게 읽혀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공감과 충격과 즐거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서윤빈>
인류의 숙원인 불멸을 이룬 사람들에겐 어떤 유희와 욕망이 남아 있을까요.
영원히 사는 신들이 신화 속에서 사랑과 전쟁의 짜릿한 승패 놀음에 열중하고 감각적 도취와 숭배와 권력 강화에 힘쓴 것처럼, 인간들도 관계 권력에 더욱 열중하게 될까요? 오래 사는 엘프들이 고도화된 예의와 예우와 의식을 강화한 것처럼, 영생하는 인간들도 서로 너무 많이 알고 너무나 집착해서 오히려 세심한 거리를 필요로 하게 될까요? 인류는 고도의 사회성을 발휘하며 야만에서 멀어지고 점점 신에게로 가까워집니다. 그 정서적 발달 도구 중에 하나가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는 영생과 사랑의 유희를 어떻게 한없이 즐길 수 있는지 작중에서 낭만적이고 디테일하게 펼쳐 보입니다. 작중연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유희를 탐하는 신들과도 같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랑은 발명되었고, 낭만은 일정 부류와 계급만이 향유하는 사치였으며, 현대에는 두 가지 다 끊임없는 환상으로 마케팅 된다는 점에서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의 절대적 가치는 매번 시험대에 오릅니다.
수많은 전설 속에서 신들은 영생과 단조로운 생활에 질려 유한성을 추구하며 심장 쫄깃한 인간이 되거나 아예 다른 존재로 환생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작품의 연인들은 원래 인간이었고, 영생은 정기적으로 육체의 일부를 부품처럼 갈아 끼우며 부품비를 감당해야 합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완벽한 저녁의 연인들에게도 영생과 사랑은 모두 철저히 유료였습니다. 이 때문에 현대, 아마도 이어질 미래 인류까지 패색이 짙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우리 서로를 어둠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영원히 사는 연인들의 반대편 작품에는 4년만 살아서 더욱 치열하고 농밀한 인간맛을 구성한 <호모 콰트로스-우석훈>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꿈꾸는 영생, 건강, 부와 명예, 사랑, 권력, 정의와 대의 등 욕망은 4년을 살건 영원을 살건 똑같아 보입니다. 작품 속의 인간들처럼 4년밖에 살 수 없다면 고도의 문명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왜 더 끈끈하고 눅진하게 생의 깊이를 맛볼 수 있는 부족사회로 돌아가지 않는가. 수면시간은 얼마인지, 자신의 수명보다 긴 과일을 먹는다면, 우리가 지금 수천 천년 전의 연꽃의 개화를 보듯 감동받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영원히 어긋났지만 끝내 그리워하며 서로에게 희망이었던 <그린레터-황모과>는 식물과 인간이 대화 가능하며 인공지능을 통해 서로를 배우고 완벽히 동등하게 소통하며 발달하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반려라고 부르는 동물들과 먹는 돼지와 닭과 동물권을 고민하는 시기에 우리가 먹는 채소의 식물권도, 어쩌면 광물권과 곤충권, 심해의 미지 생물체, 움직이지 않는 동물 산호와 진주를 갈취하는 조개 등,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할 수 없다고 무시하거나 착취하기 위해서 눈감아온 지구의 공존체들에게 갖춰야 할 인간의 예우에 대해 더 많은 질문거리가 생겼습니다.
웨어러블 로봇의 경쾌한 활극으로 몽테크리스토 백작급의 복수극과 반전의 반전으로 백미를 안겨준 <사막의 바다-이수현>는 두 주인공의 다음 모험이 시간순환 상관없이 홈즈나 뤼팽시리즈처럼 계속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전환기관-유진상> 인간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정의와 복수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과 로봇이 피부를 맞댄 <응급실의 로봇닥터-윤여경. 정지훈> 의식이 없는 인간은 선택권이 있을까요? 죽지 않는 것이 정말로 인간에게 좋은 일일까요? 영원히 사는 인간의 꿈이 반영된 AI로봇은 선악과 상관없이 인간의 꿈으로 탄생된 피조물이며, 꿈이란 것은 어쩌면 유전자단위에 신이 새겨놓은 명령이라서 인간은 ‘신의 미싱링크’를 이어 영생체를 창조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위래> 신은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학계의 담론도 있습니다. 영생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창조한 것도 인간일 지도 모릅니다.
<몸피로봇 로댕-구연상> 장애인을 지우려 하는 현대에서 고성능 몸피로봇이 모두에게 지급된다면 어떨까요? 로댕처럼 뛰어난 몸피로봇은 역시 일부 계층에게만 제공될 것이고 노동시장은 이미 늙은 노동력을 보조하기 위한 단순 웨어러블 로봇이 상용화되었다는 것에 씁쓸합니다.
한시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며 과학의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인에게 놀랍게도 무속은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신문기사의 사회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소재를 게임처럼 엮어 인간회복의 필수적인 잠조차도 스마트 폰에 얽매이게 하고, 현생 하려 드는 미지의 존재 <부굴의 눈>을 보면 정교하게 발달한 과학은 어쩌면 고대의 연금술이나 마법과 다르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이 밖에도 해우와 회포의 장-장례식에 평행우주이동 장례사라는 새로운 직업과 회사를 창조하며 눈물과 웃음으로 감동을 안겨준 <512번째 우주-김아영>, 행성 간 여행에서 실종되었다가 180도로 변해 돌아온 형을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도즈-이나경>의 행성 여행이 인간의 몸을 물리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분해 재조립하며 과정 중 누락되거나 과잉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어쩌면 모든 존재는 변화하며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지만 여전히 동일하다는 점은 공통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처음 해본 장편 심사는 아주 긴 마라톤을 완주한 기분입니다. 글은 문장 사이사이마다 작가가 설치한 장치가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폭발하거나 다음 불길을 촉발하거나 장대한 불꽃놀이처럼 글을 말미를 장식합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작가가 침묵으로 써둔 글귀가 있습니다. 장편은 이 전체 장치들이 더욱 정교하게 작동하며 긴 호흡으로 독자를 숨 가쁘게 몰아갑니다.
현재 도서 시장은 장편을 써내기가 몹시 힘든 환경입니다. 생존의 존폐와 같은 긴 시간을 견디며 완성된 모든 장대한 서사에 찬사를 보내며 감히 순위를 매겨 뽑아내야 한다는 것에 버거움을 느꼈습니다.
심사위원단의 올해의 담론은 무엇이 좋은 소설인가, 무엇이 좋은 SF소설인가였고, 둘은 접점이 있되 서로의 영역이 구분이 된다는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좋은 소설이지만 SF가 아닐 수 있고 좋은 SF소설이지만, 좋은 소설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뛰어난 작품은 둘 다에 모두 걸쳐져 있었습니다.
SF와 판타지의 모호한 구분점에서는 SF소재가 이야기 전반에 필수구성요소로, 이 장치 없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합의하였습니다. 매 심사마다 칼날처럼 의견을 벼려오시는 모든 SF어워드 구성 의원님들의 뛰어난 사유와 숙고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합니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잠시 잊게 해 주신 모든 작가님들의 건강과 안전과 부귀를 기원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장편 부문에는 예년에 이어 중편에 가까운 짧은 소설이 많았다. 소재 면으로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라는 소재가 여전히 강세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오랫동안 빈번히 다뤄진 소재인 만큼 잘 쓰기 어렵다는 말을 꼭 해두고 싶다. 예를 들어 로봇 등의 비인간 캐릭터가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대체 뭘 원해서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인지도 소설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중심적인 옛날식 이야기로 흘러가고 만다. 비인간 캐릭터를 이질적이지만 나름의 개연성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 모자란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도 주의할 점이다. 구식의 인간중심적 이야기로 그치게 된다. 현실의 우리가 겪어본 적 없는 비현실을 다루기 위해 그간 SF 소설에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왔는지 잊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즐겁지만 수상작을 가려내는 일은 늘 어렵다. 무엇이 좋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대상을 수상하기에 알맞은지 가리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번 심사위원들도 기준을 합의하기 위해 꽤 오랜 대화를 나눴다.
박애진의 [히아킨토스]와 단요의 [목소리의 증명]은 비교적 빠르게 수상 후보에 올랐다. 짜임새 있게 소설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SF를 쓰는 데 능숙했다. 더불어 SF에서 가능한, SF가 아니었다면 성립하지 않았을 소설이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한편 두 작품이 정반대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히아킨토스]는 인물의 목소리가 추가될수록 이야기가 확장되는 데 반해 [목소리의 증명]은 목소리의 수가 점점 줄어들며 초점이 한 군데로 집약한다. 그렇다면 SF와 결합할 때 어느 쪽이 더 큰 상승효과를 내는가? 수상 결과와 별개로 정답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다음으로는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황모과의 [그린 레터]와 이수현의 [사막의 바다]는 강한 호소력을 지닌 소설이었다. 전자는 난민, 후자는 환경이라는 무거운 문제에 정면으로 뛰어든다. 지리한 현실에 밀접하게 연결되면서도 좌절하거나 회의감에 빠지지 않고, 비현실을 경유하며 어떤 의지와 전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울림이 있었다. [그린 레터]의 식물 연구, [사막의 바다]의 두 여성이 보여주는 활극도 각각 매력포인트였다.
이에 반해 서윤빈의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은 장르적 문법에 충실한 소설이었다. 하드보일드 중 센티멘털과 멜랑콜리한 문장을 쓰는 소설들, 등장인물의 욕망과 파멸을 다루는 느와르, SF가 제시하는 낯선 생활방식 및 사고방식이 한 데 담겨 있었다. 취향에 따라 호오가 갈리긴 하겠지만, 장르의 특성을 충실하게 살린 소설이라 보였다. 설정의 틈새를 채우는 구체적인 묘사 덕분에 SF로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추가로, 조선희의 [부굴의 눈]은 오컬트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SF 소설로서 아쉬웠지만 한국 오컬트 SF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위래의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는 이계의 초월적 존재들이 인간을 짓누르는 코스믹 호러에 디스토피아적인 감시 사회를 결합하고, 시간을 거슬러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의 흐름을 따른다. SF의 정격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장르 문법을 아주 능숙하게 활용하며, 있어야 할 서술이 있을 법한 자리에서 나오는 덕분에 쾌감과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수상자 분들께 축하를 드리는 한편으로, 비록 수상하지 못했더라도 좋은 작품을 쓰신 분들께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올해 SF 어워드 운영에도 많은 노고가 필요했던 것으로 안다.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은 물론 관련 업무를 담당하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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