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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SF어워드 (2025)

「제12회 SF어워드」 영상부문 수상작 및 심사평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빈곤한 해였다. 아마 이건 메이저 한국 SF 장편영화나 드라마의 근원적 빈곤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 문제일 것이다. 나아가자면 할리우드 SF영화의 점점 빈곤해지는 아이디어, 끝없는 7~80년대 SF 걸작의 속편이나 리메이크로 그나마 지탱하는 장르의 위기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소설 부문이 어떻게든 새로운 아이디어와 서사를 찾아내고 있는 데 반해 영상 부문은 매해 비슷한 현실과 부딪힌다. 장르를 가지고 놀 줄 아는 영상을 만나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올해는 그래도 두 편의 독립장편이 이 장르의 한국적 변용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심사의 고통을 상쇄시켰다. 장은호 단편 소설 <천장세>를 원작으로 한 세입자는 만장일치의 수작이다. 끝없이 주거비가 치솟는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대한 공포이자 일종의 비극적 코미디인지를 거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흑백 화면 속에서 과감하게 그려낸다. SF라는 장르가 현대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다. <에스퍼의 빛>은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장르적 놀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 십 대의 놀이 문화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히어로물에 대한 재해석인 동시에, 영화와 게임, 가상현실과 AI의 시대를 아우르는 실험이다. SF가 서사가 아니라 형식이라면 <에스퍼의 빛>은 훌륭하게 이 장르에 귀속될 것이다. <나쁜피>는 애프터-판데믹 시대, 인구 소멸 시대의 우화다. 젊은이의 피가 새로운 바이러스의 유일한 치료제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문제를 인상적인 완성도로 그려낸다. <체화>는 SF와 판타지의 경계에 서 있는 퀴어 단편이다. 아서 클라크적이라기보다는 레이 브래드버리적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만약 당신의 아이들에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선하고 밝고 즐겁게 건네고 싶다면 이 단편은 값진 텍스트북이 될 것이다. <알로하>는 치매라는 질병과 기억의 문제를 시간적 서사를 재구성하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이야기하는 단편이다. 올해 꼽은 작품들은 선명하다기보다는 약간은 흐릿한 SF 장르의 경계를 타고 넘으며 장르의 확장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중요한 건 새로운 아이디어와 그걸 풀어내는 독창적인 서사와 형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래도 조금은 더 선명한 SF 장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적 불안정으로부터 비롯된 여파는 영화계에도 미치기 마련이다. 제도와 정책이 바뀌고, 바뀐 상황에서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어렵고 팍팍한 샹황을 겪는 동안 여러 영화제가 없어지고,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거나 없어졌다. 이런 현실은 영화 밖으로는 비주류 장르 영화의 판을 좁혔고, 영화 안으로는 서사와 세계관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올해 SF 어워드 영상부문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렇게 강퍅한 재난적 상황을 버텨내고 세상에 나온 생존작들이다.  반짝이는 희망이나 새로운 세계관을 펼쳐 보이기보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와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시기를 비추는 영화적 시선이 되는 작품들인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창작자들은 현실의 재난적 상황, 즉 팬데믹 이후 겪고있는 뉴노멀의 세계 안에서 경제 불평등, 기술 발전의 그늘 등을 단순히 설정이나 배경으로 삼는 것을 넘어, 이런 상황 자체를 작품의 핵심 서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세입자>는 동시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담아낸다. 이 영화는 주거 문제, 청년 문제,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SF 호러라는 독특한 장르에 녹여냈다. 어려운 영화계 상황에서 독립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문제적 상황을 인상적인 이미지와 서사로 펼쳐낸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나쁜 피>는 펜데믹 이후 사회에서 청년 세대가 겪는 불평등 문제를 재난, 좀비, 의료 장르를 결합하여 강렬하게 연출한다. 세대 간의 갈등과 불평등이 현실적이면서도 긴장감있게 펼쳐진다.

<에스퍼의 빛>은 청소년들의 온라인 라이프라는 익숙하면서도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다. 영화 매체와 디지털 문화의 속성을 실험적으로 영상화한 스타일에서 오는 감각적 재미가 새로운 세계관으로 나아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밖에 <자율주행이 너무해>는 기술이 가져올 낙관적인 미래 대신, 플랫폼 노동과 일자리 소멸이라는 현실적인 불안을 다룬다. 인공지능과 기술 발전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만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버리고, 그 속에서 소외될 개인과 가족의 근심을 들여다보는 성찰적 시선은 이 시대의 블랙홀이 된 AI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올해의 수상작들에서는 '희망'보다 ‘버티기’라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마치 영화계가 겪고 있는 상황의 프리즘과도 같다. 폐지되거나 축소된 영화제들, 통합되거나 사라진 지원제도와 정책들의 마른 땅을 버티고 생존한 감독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올해의 SF어워드 영상부문은 아쉽고도 반가웠다. 아쉬운 점을 먼저 말하자면, 여전히 상업적인 영화와 드라마의 SF는 취약했다. 작품은 많아졌지만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한다거나 SF의 외피만 불러들인 경우가 많다. 애니메이션은 늘 뛰어난 SF를 만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애니메이션은 적절한 형식이다. 올해의 SF 애니메이션은 독창적인 상상력이 부족하고, 영상에서만 튀는 작품이 많았다. 상상력의 치열한 도전이 필요하다.

마지막까지 이야기했던 작품은 단편인 송현범, 임민아의 <나쁜 피>, 홍승기의 <채화>, 류정석의 <알로하>와 장편 윤은경의 <세입자>와 정재훈의 <에스퍼의 빛>이다. <알로하>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추억과 그리움을 능숙하게 살렸지만 새롭지는 않았다. <채화>는 아이디어가 좋고 시각적 신선함이 있지만 설득이 부족했다. <나쁜 피>는 익숙한 설정임에도, 요즘 젊은 세대의 고민과 갈등을 SF적 상상력으로 확장시킨 점이 돋보였다.

독립 장편인 <세입자>와 <에스퍼의 빛>은 모두 주목할 작품이다. <세입자>는 원작이 있지만, 원작의 상상력을 영화적으로 개성적이면서 세련되게 상승시켰다. 활자와 다른 영상만의 매력을 한껏 증대시킨 작품이다. <에스퍼의 빛>은 디지털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며 젊은 세대의 독특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둘 다 박수를 아끼지 말아야 할 뛰어난 작품이다. 독립 장편의 힘이 많은 예산을 들인 영화와 드라마로 뻗어가기를 기대한다.